1부. 놀란은 왜 '오디세이아'를 '오펜하이머'로 만들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이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 신화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좋아했던 나에게 '오디세이아'는 단순한 고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 문학과 철학, 그리고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었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흔히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불린다. '일리아스'가 전쟁 서사의 원형이라면, '오디세이아'는 모든 모험담과 귀향 서사의 원형이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도, '스타워즈'도, 수많은 판타지와 영웅 서사도 결국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과연 놀란은 호메로스가 2,700년 전에 남긴 이 위대한 신화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것인가.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외였다.
"이 영화는 '오디세이아'가 아니라, 놀란이 다시 쓴 '오펜하이머'가 아닐까?"
이 말은 결코 비난이 아니다. 영화의 완성도나 연출력은 여전히 뛰어나다. 문제는 방향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만나는 경험이었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놀란의 세계관으로 호메로스를 번역한다.
그리고 그 번역 과정에서 원작이 품고 있던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은 대부분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전쟁은 한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이 질문 자체는 훌륭하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문제는 '오디세이아'가 원래 던졌던 질문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오디세이아'를 판타지 모험담으로 기억한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노래로 사람을 홀리는 세이렌, 사람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 키르케, 영생을 제안하는 여신 칼립소, 인간을 돕는 아테나….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에게 이것들은 '판타지'가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신은 실제로 인간의 삶에 개입했고, 괴물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운명과 욕망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신화는 현실과 분리된 환상이 아니라,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진지한 철학이었다.
놀란은 이 신화를 거의 모두 심리학으로 번역한다.
키클롭스는 더 이상 문명과 야만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쟁의 공포가 되고,
세이렌은 지식의 유혹 대신 트라우마의 환영이 되며,
키르케와 칼립소는 인간성과 불멸이라는 철학적 질문보다 오디세우스의 죄바카라감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아테나 역시 신적 존재라기보다 오디세우스의 양심과 내면의 목소리처럼 그려진다.
결국 신들은 인간의 심리가 되고, 괴물들은 트라우마가 되며, 모험은 속죄의 여정으로 변한다.
이것은 분명 흥미로운 해석이다.
하지만 동시에 '오디세이아'가 원래 품고 있던 다층적인 의미를 하나의 심리극으로 축소시킨 해석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원래 '전사'가 아니라 '지략가'였다
놀란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오디세우스라는 인물 자체다.
대부분 사람들은 트로이 목마를 만든 영웅 정도로 기억하지만, 호메로스가 그를 가장 자주 부르는 별명은 '폴리메티스(polymetis)', 즉 '수많은 계략을 가진 자'이다.
그는 아킬레우스처럼 가장 강한 전사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잘 속이고, 가장 잘 협상하며, 가장 잘 살아남는 인간이다.
그는 끝까지 변장하고, 거짓말하고, 상대를 시험한다.
호메로스는 이런 오디세우스를 비겁한 사기꾼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다르다.
그는 깊은 죄바카라감을 품은 전쟁 영웅이다.
말보다 침묵이 많고, 계략보다 고뇌가 많으며, 유머보다 비장함이 앞선다.
입체적인 영웅이라기보다 놀란 영화의 익숙한 주인공에 가깝다.
이 변화가 가장 먼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폴리페모스(키클롭스) 에피소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괴물을 물리치는 모험 정도로 기억하지만, 사실 고전학자들은 오디세이아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중 하나로 평가한다.
폴리페모스가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대답한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살아남는다.
거인의 눈을 찌른 뒤 다른 키클롭스들이 달려와 "누가 너를 공격했느냐?"고 묻자 폴리페모스는 "아무도(Outis)가 나를 공격했다."고 외친다.
다른 키클롭스들은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다면 신의 병이겠지."라며 돌아가 버린다.
이것은 서양문학 최초의 언어적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그리스인들이 말한 메티스(Metis), 즉 상황을 읽고 언어와 지혜로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탈출 이후 시작된다.
배 위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끝내 자존심을 참지 못하고 외친다.
"나는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다!"
이 순간 그의 완벽했던 전략은 모두 무너진다.
폴리페모스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그의 이름을 대며 저주하고, 그 저주는 이후 '오디세이아' 전체를 이끄는 운명이 된다.
얼핏 보면 영웅의 승리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지혜가 오만으로 무너지는 순간이다.
호메로스는 이 짧은 에피소드 안에 언어의 힘, 명예욕, 인간의 허영, 그리고 운명의 시작을 모두 담아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대부분 괴물과의 생존 액션으로 처리한다.
분명 긴장감은 뛰어나다.
그러나 원작이 품고 있던 철학은 상당 부분 사라진다.
키클롭스는 더 이상 인간의 오만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또 하나의 상처를 통과하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에서, 영화 전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놀란은 호메로스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호메로스를 자신의 언어로 다시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