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E.T.'를 보며 자란 어른들을 위한 또 하나의 동화
이 영화는 주변에서 "생각보다 별로였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한동안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꽤 지난 뒤, 오히려 기대를 거의 내려놓은 상태에서 극장을 찾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감독을 오래 좋아해 온 사람이라면, 마지막에는 예상치 못한 감정에 젖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초반은 솔직히 꽤 지루했다. 인물과 사건을 하나씩 배치하는 과정이 길게 이어지고,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 본론으로 들어가나' 싶은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조금씩 퍼즐 조각이 맞춰지면서 영화는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숨겨진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고, 정부와 군, 거대 조직이 왜 외계인의 존재를 숨기려 하는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사실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는 정부가 외계인의 존재를 은폐하려 하고, 이를 세상에 폭로하려는 기자와의 대결을 그린 작품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나 저널리즘을 중심으로 한 영화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이 영화의 뿌리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문득 한 작품이 계속 떠올랐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였다.
'E.T.'가 외계인과 한 소년의 우정을 그린 동화였다면, '디스클로저 데이'는 마치 그 세계관이 수십 년 뒤까지 이어졌을 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 된 주인공들이 다시 외계인과 마주하고,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진실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은 'E.T.'를 보며 자란 세대를 위한 후일담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영화 속 동물들의 연출이 무척 인상 깊었다.
붉은 홍관조(Cardinal), 사슴, 여우, 너구리 같은 귀엽고 순한 동물들이 계속 등장한다.
처음 카디널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여자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 깨어나고, 이후 남녀 주인공이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동물들의 인도를 받아 들어가 외계인들과 만나게 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동화적인 순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여러 장면을 곱씹어 보니, 이 동물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외계인들의 또 다른 모습, 혹은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형태로 자신들을 드러낸 상징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도 스필버그의 외계인관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외계인은 여전히 선한 존재다.
인류를 침략하거나 지배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반대로 악역은 언제나 인간이다.
정부와 군은 외계인을 생명체가 아니라 연구 대상이자 무기로 바라보고, 붙잡고 이용하려 한다.
그래서 영화 속 외계인들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도 무섭거나 기괴한 모습이 아니라 사슴이나 여우 같은 순하고 귀여운 동물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영화는 세계관과 설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작품은 아니다.
영화 속 핵심 장치인 '디바이스(The Device)'는 워덱스(Wardex)가 오래전 회수한 외계 유물이라는 사실만 알려질 뿐, 누가 만들었고 어떤 과학적 원리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것을 SF 기술이라기보다 인간과 외계인을 연결하는 '매개체'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 장치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능력을 발휘하는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정신적 교감을 가능하게 하며, 전자기기를 제어하거나 사람들의 지각에 영향을 주는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보여준다. 하지만 왜 그런 능력이 가능한지는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이유 역시 영화 중반 이후 회상 장면을 통해 어린 시절 외계인들에게 선택되어 일종의 실험 또는 개입을 받았다는 사실만 드러날 뿐이다. 두 사람의 능력이 왜 하필 그들에게 부여되었는지, 외계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선택했는지, 붉은 홍관조(Cardinal)가 나타나 잠들어 있던 능력을 깨우는 이유는 무엇인지까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은 단편적인 기억과 암시를 조합해 스스로 해석해야 한다.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79년 동안 미국 정부와 민간 기업 워덱스가 외계인의 존재를 은폐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외계인들이 언제부터 지구를 방문했는지, 왜 인간과 접촉하기 시작했는지, 어떤 문명을 이루고 있으며 왜 인간을 돕고자 하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는 거의 답하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관을 치밀하게 구축하는 하드 SF라기보다, 필요한 설정만 제시한 뒤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력에 맡기는 '현대판 우화'에 가깝다. 그래서 설정의 빈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반대로 'E.T.'처럼 과학보다 감정과 교감을 우선하는 스필버그 특유의 연출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오히려 이 신비로움 자체를 영화의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E.T.'라는 동화에 현대의 UFO 음모론과 미국 정부가 실제 공개했던 미확인비행현상(UAP) 자료를 섞어 만든, 어른들을 위한 SF 동화처럼 느껴졌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 '디스클로저 데이'였다.
여자 주인공이 TV 생방송을 통해 외계인의 존재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그동안 감춰져 있던 영상과 자료들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뉴스 앵커들이 당황하고, 놀라고, 울먹이며, 자신들이 보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감명 깊게 봤던 'E.T.'의 감성이 되살아나서였을까.
아니면 외계인들이 오랫동안 인간에게 연구 대상과 도구처럼 이용당해 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마지막에 외계인이 두 주인공을 바라보는 따뜻한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은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기도 했고, 부모가 아이를 다시 품에 안는 것 같은 따뜻함도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스필버그 특유의 감성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에밀리 블런트의 연기였다.
원래도 뛰어난 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 그녀는 영화의 감정을 사실상 혼자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등장하는 그녀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방송인이다. 감정보다는 사실을 우선하는 기자로서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붉은 홍관조(Cardinal)가 나타난 이후 설명할 수 없는 기억과 환영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내면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신조차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주변 사람들 역시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불안과 공포, 의심, 분노, 혼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다. 특히 자신이 어릴 적 잃어버린 기억과 외계인에 관한 진실이 하나씩 떠오르는 장면에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인물의 심리 변화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진실을 알게 된 뒤에는 자신의 슬롯적 지위나 명예보다 세상이 알아야 할 사실을 선택하고, 정부와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생방송을 통해 진실을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방송국 장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디스클로저 데이'를 전 세계에 선포하며 방송을 이어가는 모습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외계인과 다시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초반의 냉철한 기자도, 중반의 혼란에 빠진 인물도 아닌, 모든 진실을 받아들인 한 인간의 평온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비교해 보면 같은 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의 결이 달라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에밀리 블런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인상적인 연기였다.
두 번째는 'E.T.'를 연상시키는 스티븐 스필버그 특유의 연출과 음악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떠오른 작품은 단연 'E.T.였다.
외계인을 단순한 침략자가 아니라 인간보다 더 따뜻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존재로 그리는 시선부터가 'E.T.'와 닮아 있다. 어린 시절 주인공들이 숲속에서 빛을 따라가 외계인과 만나게 되는 장면은 'E.T.'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붉은 홍관조와 사슴, 여우, 너구리 같은 순한 동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연출 역시 스필버그 특유의 동화적인 감성을 한층 강화한다.
정부와 군이 외계인을 연구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모습 역시 'E.T.'에서 E.T.를 포획하려 했던 정부 조직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반대로 외계인들은 끝까지 인간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선악의 구도 역시 스필버그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외계인에 대한 철학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외계인과 다시 조우하는 장면은 'E.T.' 마지막에 느꼈던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화려한 액션이나 거대한 시각효과보다 인물들의 표정과 음악, 빛의 연출만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스필버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배경음은 1980년대 영화였던 'E.T'에서 들었던 듯한 느낌의 레트로 감성을 품고 있었다. 그 배경음이 들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E.T.'가 떠올랐고, 아마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오마주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영화가 스필버그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초반 전개는 느리고, 세계관 설명은 다소 불친절하며, 설정의 개연성을 중요하게 보는 관객이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논리적인 SF로 보기보다, 'E.T.' 이후에도 외계인은 여전히 인간을 믿고 있을 것이라는 스필버그의 오래된 신념을 담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바라본다면 전혀 다른 감동이 다가온다.
아마도 이 영화는 외계인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믿고 싶어 하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감독 자신의 마음을 담은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