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 거울을 보면 얼굴이 부어 있다. 엄마 쪽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일까?
대문을 열자 차가워진 바람에 놀랐다. 어제 아침만 해도 습한 열기가 들이쳐 숨이 막혔는데 하루 사이 뭔 일이래.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 같다. 계획을 세워놓고도 그날 마음이 시키는 쪽으로 슬쩍 방향을 튼다. 오늘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려다가 갑자기 달리고 싶어졌다. 자전거 대신 운동화를 신고 예전에 자주 찾았던 산바카라길로 향했다.
자전거를 탈 때와 걸을 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자전거 위에서는 길이 먼저 보이는데 걸으면 자꾸 딴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도 걸음마다 하나씩 피어난다. 머릿속에서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음성 노트 앱을 켰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내 말을 영 못 알아듣는다.
‘원시인들은 달려야 했고.’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저희 팀들은 달려야 하나.’
라고 받아 적었다.
어이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 내 탓이려니 했다.
다시 말했다.
‘인간은 오랜 시간 달리기를 숙명으로 갖고 태어났기에 달려야 한다.’
나중에 화면을 들여다보니,
‘인간은 오랜 시간 달걀귀도 생으로 갖고 있기에 발랄한다.’
이건 또 뭐지?
그래, 됐다. 내가 손가락으로 쓰고 말지.
그런데 나는 왜 달리려고 하는 걸까.
그냥 몸이 시켜서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일찍 눈이 떠졌고 새벽 시간이 주어졌고, 쓰고 싶고, 걷고 싶고, 달리고 싶으니까. 이유를 붙이려다 보니 달리기는커녕 또 글만 쓰고 있다.
산바카라로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다.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 왼쪽에는 벚나무가, 오른쪽에는 회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그 사이로 사람들도 줄지어 오간다.
먼발치에서 헬멧을 쓴 라이더들이 떼를 지어 달려온다. 허연 맨 무릎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나란히 걷는 부부는 강아지 한 마리를 앞세우고 이야기를 나눈다. 젊은 남자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헉헉대며 달려가고, 조금 뒤에는 젊은 여자 하나가 온 힘을 다해 그 길을 지난다.
나는 달리러 나와 그들을 구경하고 있다.
회화나무 아래에는 누르스름한 꽃잎이 수북하다. 밟으면 푹신하다. 처음에는 회화나무인 줄 몰랐다. 늦게 피는 아카시아 종류인가 했다. 한여름 다른 꽃들이 지쳐갈 무렵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는 나무. 8월에 기운을 북돋아 주는 나무 같다.
길가에는 진한 초록 잎 사이로 바싹 마른 갈색 열매가 달린 식물이 보인다. 모감주 나무다. 초록과 갈색이 한 몸에 있으니 계절 두 개가 붙어 있는 것 같다.
강가에는 노란 꽃도 피었다. 엉겅퀴를 닮았는데 내가 알던 엉겅퀴는 보라색이라 낯설다.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일단 사진부터 찍는다.
7시에 가까워질 무렵 다리 위로 올라서자 강바람이 제법 차다.
무궁화 앞을 지나던 한 여자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야, 어마어마하게 폈네.”
내 말이요.
나도 속으로 맞장구를 친다.
조금 더 가니 모과나무가 보인다. 줄기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뼈를 그대로 드러낸 마른 몸 같다. 그런데 그 앙상한 몸과 달리 잎 사이에는 물풍선 같은 초록 열매가 통통하게 매달려 있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익어 진한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지금 한여름 햇빛을 먹으며 그 향을 속에 차곡차곡 채우는 중일까.
전체가 둥근 돔처럼 부풀어 있고 가운데는 아치형으로 솟아있는 목련나무를 만났다. 비가 쏟아진다면 저 안으로 쏙 들어가 비를 피하고 싶다. 나무 한 그루가 초록 지붕을 얹은 작은 집 같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다.
글 쓰고 사진 찍느라 달리기는 하나도 못 했다.
이제 좀 달리자고요.
몇 걸음이나 뛰었을까. 또 무언가가 눈에 걸린다.
무궁화나무 아래 떨어진 보랏빛 꽃이 시들어 쪼그라들었다. 태우다 버린 담배꽁초 같다. 그 옆의 흰 꽃잎은 코를 풀고 버린 누런 휴지처럼 구겨져 있다. 나무 위에서 그렇게 곱던 꽃들이 바닥에 내려오자 딴 얼굴이 되었다. 떨어진 것들은 빠르게 시들고 썩어간다.
조금 더 가니 계수나무 잎들이 군대 열병식처럼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서 있다. 규칙적인 모양이 멋지다.
규칙적인 것은 아름다운가.
문득 우리 일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걷고, 읽고, 쓰는 일. 루틴도 멀리서 바라보면 저 계수나무 잎처럼 제법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까.
7시 10분을 넘어서자 등에 햇빛이 따갑게 꽂힌다.
뭐야.
아까 그 서늘한 바람은 어디 갔어?
속았다. 여름의 기세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어린 시절, 산에 다녀온 엄마가 망태기를 방바닥에 내려놓던 모습이 떠오른다. 망태기 안에서 이름 모를 풀과 나물과 열매들이 하나씩 쏟아져 나왔다.
나도 아침 산바카라에서 주워 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