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환상적인 여수 금오산 향일암

by문이

여수 ‘오동재’에서 언니, 동생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 고즈넉하고 정갈한 한옥 숙소가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한참 고민했다. 오늘은 여수의 어디를 가야 하나.

여수 예술랜드는 놀이기구 같은 체험을 해야 재미있을 것 같은데 우리 셋 모두 타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전시야 서울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패스.

고소동 천사벽화마을은 이 더위에 골목을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패스.

금오도는 배 시간을 맞춰야 하니 그것도 패스.

이것저것 지우다 보니 향일암이 남았다. AI에게 물어보니 ‘압도적인 남해 바다의 절경’이라는 말과 함께 아침 시간에 가볍게 산바카라하고 내려오기를 추천했다.

그래, 가볍게 산바카라이나 하자.


향일암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산을 올랐다.

입구에서 길이 둘로 갈렸다. 계단과 시멘트 오르막길.

눈앞의 시멘트 길에는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었고 계단 위로는 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몸이 먼저 계단 쪽으로 향했다.


“우리 여기로 가자.”

“묻지도 않고 정한겨?”


언니가 장난삼아 사투리를 쓰며 따라왔다.

제일 먼저 길을 정한 나는 얼마 못 가 헉헉거리며 제일 뒤로 처졌다. 그래도 숲이 우거져 그늘이 있었고 가끔 바람도 불어주니 걸을 만했다.

올라갈수록 오래된 동백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백나무가 원래 이렇게 큰 나무였구나. 난 작은 나무들만 봐서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도시에서 보았던 동백나무는 대부분 정원이나 화단에 심어진 작은 나무였다. 그런데 이곳의 오래된 동백나무들은 굵은 줄기를 뻗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에서 봄 사이, 이 숲에 붉은 동백꽃이 피면 어떨까. 푸른 남해와 붉은 동백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길은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거대한 바위들이 서로 기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틈이 생겨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자연 속에서 몸이나 움직이자며 산바카라 삼아 올라왔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계속 나타났다.


“우리 여기 오길 정말 잘했지!”


그날 이 말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모르겠다.

바위 틈을 지날 때마다 상상도 덩달아 커졌다.


“예전에 빨치산들이 이런 바위 아래 동굴에 숨기도 했겠다.”

“비 오면 여기서 피하고, 더위나 추위도 피하고. 동굴은 원시시대부터 사람들 보금자리였겠네.”


그러다가 좁은 바위 틈 앞에서는 또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뚱뚱한 사람은 여기 통과 못 할 수도 있겠다.”


감탄하다가 농담하고, 농담하다가 사진을 찍었다. 좋은 풍경에 섞여들어 오래 남기고 싶었다.

향일암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언니가 무심코 팻말 하나를 발견했다.


“전망 좋은 곳 0.4km래. 가볼까?”


싫다는 사람이 없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36도가 오가는 날씨에 우리도 참 대단하다. 그치?”

“가봤는데 별로면 어떡하지?”

“그럼 여기다 안 좋다고 써 놓을 거야.”


농담을 주고 받으며 셋 다 팻말이 가리키는 쪽으로 걷고 있었다.

땀방울이 인중에 빼곡히 돋아나고 얼굴과 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나무 그늘이 있었고 간간이 바람도 지나가 주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높이 오를수록 풍경도 달라졌다.

나뭇잎에는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바짝 마른 낙엽은 발밑에서 과자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위쪽은 벌써 가을이네.”


정상 가까이 이르렀을 때,

팻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우와, 올라오길 잘했네!”


눈앞으로 남해가 펼쳐졌다.

산 아래 작은 포구와 집들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바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흰빛이 수평선을 지워버렸다.


아까까지 덥다며 땀을 닦던 나는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시를 쓰고 싶어졌다.






<금오산의 환상>


여수 금오산에 올랐다.
산 위에서 저 멀리 바다를 보았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흰색으로 덧칠해 놓았다.


물 위의 산도
그 사이를 지나는 배도
회색빛 형체만 남아
구름 속에 둥실
달처럼 떠 있다.


저곳은 바다일까, 하늘일까.
이곳은 꿈의 세계인가.


— by 문이 (고쌤향기)




길에서 동백나무 씨도 만났다.

그 작은 씨에서 기름을 짜낸다니, 붉은 꽃만 바라보던 동백나무를 다시 보게 된다.





산딸나무 열매가 귀엽다.

나란히 줄지어 서서 고개를 쳐들고 있다. 하늘 향해 기도라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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