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바카라을 읽고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과외 선생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마주 앉아 있었다.
등을 지고 앉은, 긴 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은 선생은 어딘가 모르게 명문대에 다닐 것 같은 자존심 센 여대생 같았다.
그 선생은 갑자기 가느다랗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걸 안 했어?"
"그게 말이 되니?"
"어이가 없네."
남학생은 선생보다 몸집이 훨씬 컸지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한 표정이었다.
곧 국어 문제집을 푸는 듯했다. 선생은 계속 질문했고 학생은 자꾸 엉뚱한 대답을 했다. 답답해진 선생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분위기에서 공부가 될까.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꾸지람을 듣는다면 얼마나 창피할까. 지식은 머리에 들어갈지 몰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점점 작아지겠지.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세 번 넘게 설명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장난만 치거나 숙제를 해 오지 않을 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곤 했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내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날 읽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그 소설은 폭력을 주먹이나 발길질로만 말하지 않았다.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순간에도 폭력은 시작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존재로 보았고, 남편은 평범한 아내라는 역할로, 형부는 예술을 완성하기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영혜를 한 사람의 존재로 대하지 않았다.
카페의 그 학생도 그랬다.
그 아이는 한 사람이라기보다 성적을 올려야 하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선생도 학생을 잘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부모 또한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학원을 옮기고 과외를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도, 교육도, 걱정도 때로는 두려움과 욕망을 품는다. 그 속에서 아이는 한 생명이기보다 성적이란 숫자로 먼저 평가받는다.
문득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시험 범위만 벼락치기로 외우고, 왜 그런지 이해하기보다 정답을 맞히는 데 급급했던 시간들. 배우는 즐거움보다 틀릴까 두려웠던 기억. 나는 공부를 했지만 진짜 배움은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우연히 마주한 카페의 한 장면을 멀리 떨어져서 보게되니 못 생긴 내 모습이 보였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래서 교육에는 지식보다 수행에 가까운 인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