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40대 초반의 여성이 찾아왔다.
남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이 얼마나 무심한지, 얼마나 자기 말을 안 듣는지, 결혼 이후로 얼마나 외로웠는지. 말이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런데 뭔가 어긋났다.
목소리는 분노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말 사이사이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말이 끝날 때마다 잠깐 멈추는 그 간격. 그 간격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남편한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뭐예요?"
멈췄다. 잠시 후 대답했다.
"그냥... 네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말 한마디요.
그 순간 눈물이 흘렀다. 남편 이야기를 아무리 길게 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다.
하고 싶었던 말은 남편 비판이 아니었다.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꺼내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가장 먼 곳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핵심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직접 말했다가 외면당하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아온다. 한참 돌아서 온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못 한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자기 스스로도 모른다.
나는 렘마의 이 생각을 이렇게 읽는다. 우리가 듣는 말은 텍스트다.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이 하부텍스트다(렘마, 2022: 326).
그런데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 두 겹은 렘마의 용어보다 더 날것이다. 텍스트와 하부텍스트라는 말이 깔끔하게 정리된 이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사람 앞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뒤엉켜 있다. 말의 표면과 바닥이 서로 싸우고 있다. 한 문장 안에서.
프로이트가 꿈 연구에서 발견한 것도 이것이었다. 꿈의 명시적 내용 아래에는 반드시 잠재적 내용이 있다. 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원본은 따로 있다.
이 원칙은 꿈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모든 말에 해당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상담 초기에 내담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들었다. 남편 이야기면 남편 문제라고 생각했다. 온라인 게임 이야기면 온라인 게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담이 끝나고 나면 늘 뭔가 미진했다.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 느낌. 한 시간 동안 열심히 들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계속 반복됐다.
내가 너무 표면만 들었다는 것을. 말이 말한 것만 들었다는 것을.
이것을 뒤집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귀를 바꾸는 일이었다. 말을 듣는 귀에서 말 뒤를 듣는 귀로. 이건 기술이 아니다. 태도다. 지금 내담자가 하는 말이 그 말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태도. 그 태도가 먼저 있어야 귀가 바뀐다.
무의식적 의사소통은 세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압축, 전치(轉置, Displacement), 상징화라고 불렀다(렘마, 2022: 327에서 재인용).
압축부터 보자.
내담자가 말한다. 엄마가 자꾸 전화해요. 뭘 먹었냐, 어떻게 지내냐. 귀찮아요.
표면만 들으면 엄마가 귀찮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짧은 말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눌려 있는지. 엄마에 대한 짜증. 그 짜증 뒤에 있는 애정. 그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불편함. 독립하고 싶은 욕망과 의존하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말 하나에 감정 열 개가 들어 있다.
전치(轉置, Displacement)는 더 자주 만난다. 내담자가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할 때, 그 분노의 실제 목적지가 다른 곳에 있는 경우다. 부모한테 직접 하지 못하는 말을 친구한테 옮겨놓는 것. 치료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온라인 게임 상사에게 실어 보내는 것. 진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다.
전치를 놓쳤던 날들이 있다.
어떤 내담자가 어머니 이야기를 한참 했다. 나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열심히 들었다. 상담이 끝날 때 그가 말했다.
"사실은 선생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인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한 시간 내내 전치를 놓쳤던 것이다. 어머니 이야기 안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전치를 놓쳤을 때 솔직하게 말한다. "아까 그 이야기에서 제가 더 들었어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거기로 돌아가도 될까요."
그 말이 내담자를 불편하게 할까봐 처음에는 두려웠다. 그런데 대부분 오히려 안도한다. 내가 놓쳤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상담자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 경험이 오히려 관계를 깊게 한다.
상징화는 꿈에서 가장 잘 보이지만, 깨어 있을 때도 작동한다.
한 남성이 말했다. 요즘 자꾸 좁은 공간이 답답하다고. 지하철도 힘들고, 엘리베이터도 힘들다고.
폐쇄공포증처럼 들린다. 그런데 상담을 계속하다 보니 다른 게 보였다. 삶이 좁았다. 선택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대한 두려움은 좁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직접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른 형상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세 가지를 알고 나면 상담실이 달라진다. 내담자가 하는 말을 들을 때 자동으로 두 개의 질문이 따라온다. 이 말의 표면은 무엇인가. 이 말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 층위를 동시에 청취하는 것. 이게 분석적 경청이다.
나지오는 이렇게 관찰했다. 우리는 환자가 말하는 것뿐 아니라, 환자가 말하지 않는 것도 듣는다(나지오, 2025: 108).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을 듣는 귀가 있어야 진짜 상담이 된다.
없는 것을 어떻게 듣는가.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은 말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침묵 안에 있고, 목소리 떨림 안에 있고, 주제가 갑자기 바뀌는 순간 안에 있다.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은 그 말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아니, 때로는 더 중요하다. 말을 빠르게 쏟아낸다는 것. 갑자기 느려진다는 것. 특정 주제가 나오면 목소리가 낮아진다는 것. 어떤 말은 마무리 없이 끝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정보다.
때로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은 실제로 말해진 것보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전달되는 방식에 있다(렘마, 2022: 332).
나는 상담 초기에 내용에만 집중했다. 내담자가 무슨 말을 하는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하는가.
내용과 방식이 어긋날 때가 더 중요하다. 말은 괜찮다고 하는데 목소리는 괜찮지 않을 때.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데 눈은 웃지 않을 때. 그 어긋남이 하부텍스트의 위치를 알려준다.
하부텍스트가 들리기 시작하는 신호들이 있다. 말이 갑자기 바뀔 때. 주제가 무관해 보이는 곳으로 점프할 때. 목소리의 톤이 달라질 때. 잠깐 멈출 때. 특정 단어를 반복할 때.
이 신호들이 하부텍스트의 출입구다.
상담자 자신의 불안이 이 감각을 방해한다. 내담자가 말을 모호하게 할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를 때, 그 불확실성이 불편해진다. 빨리 정리하고 싶어진다.
이 충동이 하부텍스트를 차단한다.
알고 싶다는 욕망보다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이 먼저다.
그 기다림이 처음에는 불안하다. 상담자로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 자체가 하는 것이다. 열려 있는 것 자체가 개입이다.
내담자는 이 공간이 안전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때서야 더 깊은 것을 꺼낸다. 상담자가 조급하면 내담자도 조급해진다. 상담자가 기다리면 내담자도 기다릴 수 있다.
렘마는 이것을 관찰했다. 분석적 경청에는 경청자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것도 포함된다(렘마, 2022: 330). 내담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 자신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동시에 보는 것.
이게 어렵다. 두 곳을 동시에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해질 때 역전이를 신호로 쓸 수 있게 된다. 내가 지금 이상하게 졸리다. 왜 이 내담자 앞에서만 이런가. 그 졸음이 정보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나의 몸이 먼저 알아챈 것이다.
하부텍스트는 말로만 오지 않는다. 몸짓으로도 오고, 침묵으로도 오고, 상담자 자신의 감각으로도 온다. 그 모든 통로를 열어두는 것. 그것이 두 개의 귀로 듣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분석적 경청은 수동적 과정이 아니다(렘마, 2022: 328). 들린다는 게 아니라 듣는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행위다. 내담자가 마음속에서 투사하는 것들을 자신이 받아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열어두는 것. 그 열려 있음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떠내려가지 않는 것.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
상담실에서 반복해서 목격한 장면이 있다.
한 시간 내내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끝나기 5분 전에 갑자기 진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끝날 때 꺼내는가. 처음부터 하면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안다. 한 시간 동안 용기를 모은 것이다. 충분히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꺼낸 것이다. 그 5분이 진짜 상담이었다. 앞의 55분은 그 5분을 위한 준비였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로 마지막 5분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앞의 55분을 더 조심스럽게 다루게 되었다. 그 55분이 안전하지 않으면 마지막 5분이 열리지 않는다.
50대 중반의 남자가 왔다. 처음에는 건강 걱정으로 왔다고 했다. 잠을 못 잔다고, 두통이 심하다고. 건강 이야기를 한참 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요즘 회사에서 입지가 좀 흔들리는 것 같다고. 20년 넘게 같이 일한 후배가 자기 자리를 넘보는 것 같다고.
나는 물었다. 그 후배와 어떤 관계냐고.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제가 데리고 키웠어요. 아들처럼 생각했어요."
거기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건강 문제가 아니었다. 배신감이었다. 아들처럼 키운 사람에게 등을 찔린 느낌. 그 밑에 더 깊은 것이 있었다. 자신이 이제 조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공포.
몸이 말하고 있었다.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울었다.
커버스토리를 걷어내려고 하면 안 된다. 그게 왜 거기 있는지를 먼저 존중해야 한다. 두통으로 온 남자가 그 증상을 들고 온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증상이 없었으면 상담실 문을 두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커버스토리는 겁쟁이가 쓰는 속임수가 아니다. 용기 있는 우회다.
사람들은 진짜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먼저 안전한 이야기를 들고 온다. 그 우회가 얼마나 긴 여정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상담자가 그 여정을 서두르면, 내담자는 문을 닫는다.
그가 처음 왔을 때, 나는 건강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 두통이 언제부터였는지, 어떤 상황에서 더 심해지는지. 그 이야기를 서두르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자 조금씩 더 이야기했다. 회사 이야기가 나왔다. 후배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처럼 키웠다는 말이 나왔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건강 이야기는 부차적이라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밀었다면, 문을 닫았을 것이다. 표면이 충분히 수용되어야 심층이 열린다.
렘마는 이것을 관찰했다. 우리의 이상적인 개입은 환자가 전달하는 잠재적인 내용과, 환자가 소통하는 명시적인 내용에 대한 인정 모두를 전달하는 것이다(렘마, 2022: 333). 표면도 인정하고, 심층도 다루는 것. 어느 하나를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표면을 오래 다루다 보면 심층으로 가는 타이밍을 놓친다. 심층으로 급하게 가면 표면이 충분히 수용되지 않아 내담자가 닫힌다. 그 균형을 찾는 것이 상담자의 기술이다. 이론으로 배울 수 없다. 상담실에서 반복해서 틀리면서 배우는 것이다.
문을 부수면 사람도 없어진다. 문을 통해 함께 들어가야 한다.
30대 중반의 여성이 있었다. 온라인 게임을 그만둘지 말지 모르겠다고 했다. 온라인 게임 환경이 얼마나 힘든지, 상사가 얼마나 어려운 사람인지를 한참 이야기했다.
나는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냐고.
잠깐 멈췄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그냥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온라인 게임 이야기가 아니었다. 소진 이야기였다. 정말 필요했던 것은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라는 허락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태가 정상이라는 확인이었다.
나지오는 이것을 관찰했다. 해석한다는 것은 환자도 이미 어렴풋이 아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라고(나지오, 2025: 160).
그런데 상담실에서 만나는 이 순간은 나지오의 문장보다 더 미세하다. 이미 어렴풋이 아는 것. 그게 하부텍스트다.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 그것이 해석이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는 타이밍이 틀리면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무 빨리 이름을 붙이면 '그런 게 아닌데요'라고 닫힌다. 너무 늦으면 이미 그 순간이 지나가 있다.
50대 남자는 그날 상담이 끝날 때 이렇게 말했다.
"말씀 들으면서 제가 두려웠던 게 뭔지 처음 알았어요."
두려운 것을 몰랐던 게 아니다.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 두려움에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름 없이 몸속에 살았던 것이다. 두통으로, 불면으로.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다뤄질 수 있는 것이 된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못했다.
화가 나면 슬프다고 했고, 슬프면 괜찮다고 했다. 그 패턴을 알아채는 데 오래 걸렸다. 알아챈 뒤에야 타인의 패턴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하부텍스트를 아는 것이 타인의 하부텍스트를 읽는 기반이 된다.
이것이 정신분석가들이 자신도 먼저 분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자기 자신의 말 아래에 있는 것을 먼저 들을 수 있어야 타인의 말 아래에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순서는 뒤집히지 않는다.
이 일을 오래 하면서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사람은 결국 이해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냥 이해받고 싶은 게 아니다.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이해받고 싶어 한다. 자신도 잘 모르는 자신까지 이해받고 싶어 한다.
상담은 그 욕망에 응답하는 시도다. 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는 것.
렘마는 이렇게 관찰했다. 분석적 경청은, 일반적인 경청과는 달리, 다층적인 수준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렘마, 2022: 331).
다층적이라는 것. 한 층만 들으면 안 된다는 것. 표면과 심층을, 내용과 방식을,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을 동시에 듣는 것.
그 귀를 키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로는 알았다. 말은 두 겹이라는 것을. 그런데 실제 상담 장면에서 그것을 감지하는 건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마치 악기 소리에서 특정 음을 걸러 듣는 훈련처럼. 처음에는 들리지 않는다. 연습이 쌓이면서 서서히 들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들리는 게 당연해진다.
상담자의 성장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한쪽은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 다른 쪽은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 이 두 방향은 사실 하나다. 자기를 더 잘 알수록 타인을 더 잘 알게 된다.
내가 화가 났다고 말할 때 실은 무서운 건 아닌가.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 실은 괜찮지 않은 건 아닌가.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일을 처음 배울 때 선생이 한 말이 있다. 환자의 말을 너무 빨리 이해하면 안 된다. 빨리 이해했다고 느껴지는 순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있다는 신호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이해를 열어두라는 말이었다. 이게 전부일 수도 있고, 이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것. 확정하지 않는 것. 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닫힌 귀는 피곤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열린 귀는 때로 벅차다. 그러나 그 귀가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 자신의 하부텍스트에 처음으로 닿는 순간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그 순간은 언제나 조용하다. 갑자기 큰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다. 뭔가 멈추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눈물이 차오르는 것. 그게 하부텍스트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상담자의 일이다.
렘마는 이것을 관찰했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 아마 결코 말해지지 않을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분석적 경청이다(렘마, 2022: 332).
이것이 가능하려면 상담자가 먼저 자기 자신의 하부텍스트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어떤 말을 들을 때 긴장하는지. 어떤 주제가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화제를 돌리는지. 그 패턴을 알아야 내담자의 패턴도 보인다.
두 겹의 말. 그 두 겹을 동시에 듣는 귀. 상담자가 그 귀를 갖게 될 때,
내담자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말을 듣게 된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자기 귀로는 들리지 않던 말이. 상담자의 귀를 통해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이 일의 시작이고, 그 차이가 이 일의 전부다.
나는 오늘도 상담실에 앉는다. 두 개의 귀를 열고.
하나는 지금 하는 말을 위해. 또 하나는 그 아래에 있는 말을 위해.
두 귀가 동시에 살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