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1985년, 에티오피아에서 최대 120만 명이 아사했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에티오피아 전역을 강타한 대기근으로 당시 전체 인구 약 3,800만 명에서 4,000만 명 중 775만 명 이상이 극심한 기아 상태에 빠졌으며, 최소 3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참혹한 사태로 인해 250만 명의 국내 실향민과 40만 명의 국경 난민이 양산되었고,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고아가 발생하며 국가의 슬롯적 기반이 흔들렸습니다. 당시 서방 세계의 주류 언론과 국제 구호 단체는 이 비극을 가뭄과 인구 과잉, 생태계 파괴가 빚어낸 전형적인 자연재해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대기근을 깊이 있게 분석한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은 대기근을 단순한 기상 이변이 아니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이끄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군사 독재 정권인 데르그(Derg)의 잔혹한 정치적 결정과 구조적 폭력이었습니다. 반정부 반군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데르그 정권은 식량의 흐름을 통제하고 국제 구호물자를 차단하는 등 '기아의 무기화' 정바카라을 체계적으로 실행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Derg)의 등장과 철권통치
1888년부터 1892년 사이, 에티오피아는 이 시기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대기근을 겪은 바 있으며, 1958년과 1966년에도 수만 명이 사망하는 등 국지적 기근이 끊이지 않는 국가였습니다. 특히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월로 지역을 강타한 기근은 4만 명에서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당시 영국 언론인 조나단 딤블비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미지의 기근(The Unknown Famine)'은 궁중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모습과 굶어 죽어가는 농민들의 비참한 참상을 교차 편집하여 방영했고, 이는 지식인층과 군부의 거센 분노를 촉발했습니다.
기근에 대한 황실의 무능과 은폐 시도는 정권의 정당성을 잃게 만들었고, 1974년 6월 에티오피아 군대, 경찰, 영토방위군의 하급 장교 및 부사관들이 중심이 되어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PMAC), 일명 데르그(Derg)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초기에는 109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남부 나겔레와 비쇼프투 공군 기지 등에서 발생한 군내 소요 사태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등장했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같은 해 9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전격 폐위시켰습니다.
데르그 정권의 내부 권력 투쟁은 매우 잔혹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초대 의장이었던 아만 안돔 중장이 급진파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 과정에서 60명의 옛 제국 관료들이 함께 처형되는 '60인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이후 타파리 벤티(Tafari Benti)를 거쳐 1977년 최종적으로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절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멩기스투 정권은 극단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반체제 인사와 경쟁 좌파 단체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EPRP), 전에티오피아슬롯주의운동(MEISON) 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적색 테러(Qey Shibir)를 감행했습니다.
이 시기 최대 98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재판 없이 투옥되거나 처형당한 것으로 추산되며, 에티오피아의 경제와 농업 기반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데르그 정권은 봉건적 토지 제도를 철폐한다는 명분 하에 농지를 국유화했으나, 이는 농민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가 농민을 수탈하는 더욱 억압적인 체제로의 전환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권력 구조의 공고화는 이후 대가뭄이 도래했을 때,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는커녕 반군을 절멸시키기 위한 군사적 수단으로 굶주림을 활용할 수 있는 완벽한 제도적, 정치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엘니뇨와 강수 패턴 변화
에티오피아 대기근을 촉발한 1차적이고 물리적인 원인은 에티오피아 북부 및 중부 지역을 덮친 역사적인 기상 이변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농업 인구의 대다수는 자연 강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천수답 농업'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절적 비의 주기적 변동은 식량 안보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아프리카 사헬 지대와 에티오피아 고원 지대에 강수량 감소로 인한 가뭄의 전조가 나타났습니다. 1983년의 부분적인 강수량 부족으로 이미 농작물 수확량이 급감하여 전국적인 곡물 가격이 300% 이상 폭등하는 등 극심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84년 도래한 유례없이 강력한 엘니뇨(El Niño) 현상이 전 지구적 대기 순환을 교란시켰고, 특히 에티오피아의 주요 강수 패턴을 완전히 변했습니다. 두 번의 큰 우기에 의존하는 에티오피아의 농업에서 인구의 약 10%가 파종을 위해 의존하는 2월에서 5월 사이의 '벨그(Belg)' 비는 1984년에 평년보다 한 달 이상 늦게 내리거나 아예 내리지 않았습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연간 강수량의 50%에서 80%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우기인 6월에서 9월 사이의 '키렘트(Kiremt)'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습니다. 엘니뇨의 영향으로 에티오피아 북서부 및 중앙 고원 지대는 극도로 건조한 기단에 갇혔습니다.
고잠, 하라르게, 티그라이, 월로 등 주요 곡창지대 및 인구 밀집 지역의 농작물은 파종조차 하지 못하거나 성장 도중 완전히 말라죽었습니다. 그러나 기상학자들과 기근 전문가들은 강수량의 절대적 부족만으로는 100만 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아사자와 수백만 명의 실향민 발생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등에서 이미 1983년 강수량 감소 및 가뭄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으나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를 의도적으로 묵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기근은 단순한 기상학적 원인이 아닌 정치적인 방조와 조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아의 무기화와 반란 진압
대기근의 가장 치명적인 변수는 데르그 정권이 자국민의 생존보다 내전 승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 정부는 EPLF, TPLF, OLF 등 분리주의 무장 단체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반군은 혹독한 산악 지형을 바탕으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며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멩기스투 정권은 가뭄으로 초래된 식량 위기를 반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전략적 기회로 삼았습니다. 휴먼라이츠워치와 옥스팜 등 국제 인권 및 구호 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정부는 북부 분쟁 지역의 인구를 아사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반군의 물적, 인적 자원 공급망을 단절시키기 위해 '기아의 무기화'를 조직적으로 자행했습니다.
농업 인프라와 시장의 고의적 파괴, 국제 구호 물자 진입 원천 봉쇄
정부군은 반군 장악 지역의 마을에 진입하여 단순히 전투만 벌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간인의 농경지를 고의로 짓밟고, 수확하여 저장해 둔 곡물 창고를 폭격했으며, 가축을 무차별적으로 도살하거나 징발했습니다.
이는 농민들이 반군에게 식량을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전술의 일환이었으며 반군 지역의 시장을 폭격하여 지역 경제 네트워크를 마비시켰습니다. 에티오피아 기근 사태가 전 세계에 알려지자 국제 구호 식량이 항구를 통해 들어왔으나 정부는 이 물자가 반군 장악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국제 구호 단체들이 항공기나 트럭으로 고립된 지역에 접근할 때마다 정부군은 폭격과 포격으로 진입을 방해했습니다. 안 그래도 지형이 험준하고 도로망이 열악한 곳에 정부의 군사적 봉쇄 작전이 더해지자 곳곳의 주민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근이 절정에 달했던 1984년, 멩기스투 정권은 에티오피아 국민총생산(GNP)의 무려 46%를 군사비로 지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반면 국가 보건 예산은 1990~1991년 무렵 6%에서 3%로 급감했습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정부 예산의 절반이 내전 수행에 쓰였다는 것은 자국민보다 체제 유지 및 군사적 억압이 우선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근 학자인 알렉스 드 발(Alex de Waal)은 이 기간 동안 사망한 희생자 40만 명에서 5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가뭄 때문이 아니라 데르그 정권의 인권 유린과 군사적 작전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추산했습니다. 또한 내전 자체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만 15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즉, 1983~1985년의 에티오피아 대기근은 이상 기후와 독재 정권이 함께 적용된 '인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