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을까?
1932~33년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는 약 39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인구학자들이 따로 계산한 '태어나지 못한 아이' 60만 명까지 합치면 손실은 약 450만 명입니다. 날씨가 나빴던 것도 사실이지만, 연구자 대다수는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결정적 원인이 가뭄이 아니라 정치였다고 봅니다.
핵심 요약
홀로도모르(1932~33)는 스탈린 정권의 강제 집단화, 과도한 곡물 징발, 우크라이나와 쿠반을 겨냥한 봉쇄 조치가 만든 대기근입니다. 사망자는 약 350만~500만 명이며, 가장 정밀한 인구학 추정치는 초과사망 390만 명입니다.
1932년 흉작에는 곰팡이병과 습한 날씨 같은 자연 요인도 있었습니다. 다만 계량 연구에서는 날씨가 초과사망의 최대 8.1%, 집단화가 최대 52%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제노사이드' 인정 여부는 학계와 국제정치에서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2025년 11월 기준 우크라이나 외교부 집계로 28개국 의회가 제노사이드로 인정했습니다.
핵심 포인트
사망자: 초과사망 약 390만 명에 출생 손실 약 60만 명을 더해 총 약 450만 명입니다. 7~1,000만 명이라는 정치적 주장은 인구학적으로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정점: HREC가 인용한 볼로비나 외(2020) 연구에 따르면 1933년 6월에는 하루 약 2만 8천 명이 숨졌고, 그중 31%가 10세 미만 어린이였습니다.
탈출 봉쇄: 전체주의역사재단(Foundation for the History of Totalitarianism)에 따르면 1933년 1월 22일 지령 후 50일 동안 21만 9천 명이 붙잡혔고, 대부분 굶주린 마을로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날씨의 역할: 녹병·깜부기병 피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1~32년 날씨만으로 예측한 수확량은 평년 수준이었습니다.
기후 교훈: 같은 땅에 같은 가뭄이 들어도, 정보가 열려 있는지와 식량이 무기로 쓰이는지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집니다.
프롤로그: 풍부한 영양분을 가진 우크라이나의 검은 흙
1933년 3월, 스물일곱 살의 웨일스 기자 한 명이 눈 덮인 우크라이나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개러스 존스입니다. 소련 당국은 외국 기자의 우크라이나 여행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시를 피해 기차에서 내렸고, 약 64km를 걸어서 마을과 집단농장을 하나씩 지나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같은 말이 들렸다고 그는 나중에 적었습니다. "빵이 없어요. 우린 죽어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존스가 밣고 있던 흙은 지구에서 가장 기름진 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흙을 한 줌 쥐어 보면 색이 거의 검습니다. 이 흙을 '체르노젬(chernozem)', 우리말로 '흑토'라고 부릅니다. 수천 년 동안 스텝 초원의 풀이 자라고 시들고 썩는 일이 반복되면서, 유기물이 풍부한 부식토가 두껍게 쌓인 결과입니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중부의 흑토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 중 하나이며, 국토의 약 3분의 2를 덮고 있습니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은행은 우크라이나에 전 세계 흑토 자원의 약 3분의 1이 있고, 흑토가 경작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이 비율은 흑토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15% 안팎부터 3분의 1까지 차이가 납니다. 어느 기준으로 보든 우크라이나가 세계적인 흑토 대국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오래전부터 유럽의 빵바구니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빵바구니 위에서 1933년 봄,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관계와 홀로도모르 단어의 유례
홀로도모르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소속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슬롯주의 공화국'이었습니다. 두 주권국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홀로도모르(Holodomor)라는 이름은 우크라이나어 홀로드(holod, 굶주림)와 모르(mor, 절멸·죽음)를 합친 말입니다. '굶겨서 죽이다(moryty holodom)'라는 표현에서 왔고, 그냥 '굶어 죽음'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죽게 만듦'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1장. 1929년, 공장을 위해 들판을 바꾸다
이야기는 1928년에 시작됩니다. 스탈린은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농업국이던 소련을 단숨에 공업국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공장과 기계를 사려면 외화가 필요했고, 소련이 팔 수 있는 가장 큰 상품이 곡물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캐나다 앨버타대 우크라이나 연구소 편찬)은 소련 지도부가 곡물을 수출해 외화를 벌고 그 돈으로 급속한 공업화를 뒷받침하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곡물이 사실상 달러 역할을 한 것입니다.
곡물을 확실하게 거두려고 스탈린이 꺼낸 카드가 집단화입니다. 1929년 11월부터 소련은 농민들의 땅, 가축, 농기구를 빼앗아 거대한 집단농장에 묶었습니다. 집단농장에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쿨라크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원래 의미는 부농이지만 현실에서는 "국가에 협조하지 않는 농민"이라는 낙인이었습니다.
쿨라크로 찍힌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일부는 처형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많은 수가 우랄,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같은 먼 곳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소련 기록 문서에 따르면 1930~31년 소련 전역에서 쿨라크로 찍힌 가구의 농민 약 180만 명이 강제이주되었습니다. '살기 위해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떠나도록 강요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특히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소련 비밀경찰(OGPU) 집계를 보면 1930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농민 소요가 4,098건이었습니다. 소련 전체의 29.7%였고, 참가자는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인구가 소련의 약 20%였던 것을 생각하면 저항이 유난히 컸습니다. 가축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잡아먹겠다며 소와 말을 도살하는 농민도 많았습니다.
말이 사라지자 밭을 갈 힘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1930년은 날씨가 좋아 풍작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수확량 약 2,230만 톤 가운데 770만 톤을 국가에 넘겼습니다. 문제는 1931년입니다. 수확량이 1,380만 톤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국가는 약 725만 톤을 가져갔습니다. 수확의 절반 이상을 떼어 간 것입니다. 농가의 비축 식량은 바닥났고, 1932년 봄에 이미 굶주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아사자 발생은 가뭄이 원인이었을까?
날씨가 한몫한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수백만 명의 죽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1931년에는 볼가강 유역, 카자흐스탄, 시베리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1932년에는 양상이 좀 달랐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전국적인 대가뭄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부 시기에 비가 지나치게 많이 오고 습했습니다.
습한 날씨는 곰팡이병에 유리합니다. 밀 줄기와 잎에 녹이 슨 듯한 반점을 만드는 녹병, 이삭을 검은 가루로 바꿔 버리는 깜부기병이 퍼졌습니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의 역사학자 마크 토거는 이 병해로 약 710만 톤, 공식 수확량의 약 13%가 사라졌다고 추정합니다.
그는 해충과 쥐, 그리고 밭을 제대로 갈지 못해 무성해진 잡초까지 겹쳐 1932년 실제 수확이 공식 통계보다 훨씬 적었다고 주장합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데이비스와 휘트크로프트도 『기근의 해들(2004)』에서 소련 전체 1932년 수확을 공식 통계 6,890만 톤보다 낮은 5,500만~6,000만 톤으로 봅니다.
날씨가 비슷했던 과거에 비해 왜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까?
최근에는 경제학자들이 이 논쟁에 데이터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대표적인 연구가 나탈리야 나우멘코가 2021년 경제사 분야 최고 학술지인 『Journal of Economic History』에 실은 논문입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1931~32년 기상 자료로 예측한 수확량은 1924~29년 평균과 거의 같았습니다. 날씨로 설명되는 초과사망은 최대 8.1%에 그쳤습니다. 반면 집단화는 초과사망의 최대 52%를 설명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과 독일계 주민이 차별받은 흔적도 일부 발견되었습니다.
후속 연구에서 소련 전역의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여기서도 기근 사망률은 집단화와 곡물 징발이 강할수록 높았고, 우크라이나인 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기근이 더 가혹했습니다. 연구진은 곡물 생산을 통제하려는 욕구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작용했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2020년 학술지 『Nationalities Papers』에 실린 쿨릭의 우크라이나·러시아 비교 연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초과사망이 가장 높았던 곳은 곡물 징발의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억압 정바카라이 유난히 가혹했던 지역들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곳에서 민족이 핵심 요인이었을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