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인생의 안전기지

by윤병옥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노년에 생기를 주는 것은 손주를 보는 일이다.

멀리 있을 때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재롱을 보고, 우리 집에 있을 때는 함께 지내며 조부모와 낯을 익히고, 아들 집에 있을 때는 가끔 방문하여 손녀를 본다.

그럴 때면 내가 이유식을 먹이겠다고 고집부린다. 모두 알다시피 아기가 먹을 것을 받아먹는 모습은 너무 귀엽기 때문이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으며 빨리 달라고 재촉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아기가 볼 때마다 크고 새로운 행동들을 하는 것이 신기하다. 왜 안 길까 걱정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무릎으로 쏜살같이 기어 다닌다. 기둥이나 낮은 벽을 짚고 벌떡 일어나서 붙잡고 발도 조금씩 뗀다. 낯 가릴까 봐 걱정했는데, 내가 손을 내밀면 할머니에게 오겠다고 두 팔을 내게 향할 때는 감동한다.


아기가 어릴 때는 분리 수면을 시켰다. 나는 같이 자야 좋다고 생각하지만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기도 하고, ‘라떼’ 시부모가 될까 봐 육아 방식에는 참견하지 않는다. 요즘 부모들이 정보도 많고 똑똑하기도 해서 내가 아이들 키울 때에 비해 기준이 확고해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아기를 밤에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캠을 설치해서 아기의 상태를 파악해서 울거나 이상하면 당장 달려간다. 그래도 말 못 하는 아기가 불안한 마음을 표현할 수단도 없을 때 혼자 놔두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아기가 조금 크니 혼자서 잘 때 너무 자주 깨서 울게 되고 결국 며느리는 손녀와 함께 자기 시작했다. 손녀는 잘 때 엄마 머리카락도 만지고 팔 위에 눕기도 하고 잠잘 때도 엄마 손을 잡아야 길게 자기 시작했다. 잠을 깨서도 엄마가 옆에 있으면 싱글벙글 웃으며 엄마를 타고 놀고는 한다. 물론 이 시기가 엄마에게 집착해서 화장실 갈 때도 데리고 가야 하는 악명 높은 시기이기는 하다. 하하.

아기가 아플 때 어른이 힘든 이유는 그들이 아직 말을 못 하니 어디가 아프다고 설명할 수 없어서이다. 마찬가지로 아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그들이 말을 못 하니 꼭 짚어 알 수 없다. 그저 어른들이 이게 좋다, 저게 좋다고 추론할 뿐이다. 다만 소아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만 3세 이전에 뇌 발달이 대부분 이루어지고 정서적인 안정도 이때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대단히 과학적인 지혜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부모가 힘들어도 그들의 선택으로 낳은 아기에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아기가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대부분은 엄마)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사람과 ‘애착 형성’이 잘 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그 사람과 잠시 떨어져서 놀이를 해도 잠시 뒤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아이가 혼란스럽지 않고 안정적인 사람으로 자란다. 엄마 없이 주변을 탐색하는 반경이 점점 넓어지지만 일정 거리나 시간 이후에는 반드시 엄마가 보여야 안심한다. 이런 독립과정은 천천히 점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안정된 애착 형성을 이룬 아이는 평생 불안하지 않고 안정적인 정서를 가지게 된다. 마치 높은 산을 등반할 때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놓고 조금씩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다 위험하다 싶으면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쉬고 몸을 회복한 후 다시 도전한다. 이렇게 엄마는 아기에게 베이프캠프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른이 된 후의 베이스캠프는 누구인가?

내가 할머니가 된 후에도 베이스캠프가 있나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그런 존재는 필요하다. 돌아가셨지만 부모님들은 여전히 나를 믿어주는 베이스캠프같은 존재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형제들도 있다. 평생 나의 못난 모습을 많이 보았지만 견뎌주는 남편도 그렇다. 기쁨을 나누고 슬픔도 위로해 준 친구들도 있다.

나이가 드니 내가 많은 사람들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주기도 한다. 우선 자식들에게 언제든 와서 쉬어가고 기력을 충전해갈 수 있는 집같은 존재가 되어주려고 한다. 집에 일단 와서 잘 먹고 쉬며 회복하고 가기 바란다.

함께 늙어가는 배우자에게도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생이 끝날 때까지 서로 보살피며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

미력한 글이지만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에게도 내글이 작은 베이스캠프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대단한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마음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성공이라는 소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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