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불교 용어로, 모든 일이 적절하거나 결정적인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시절인연’이란 단어는, 인연에는 때가 있으니 관계가 멀어지거나 끝나는 것도 붙잡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한쪽은 붙잡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때가 온다는 말이고, 다른 한쪽은 한때는 중요했어도 열정이 식으면 놓아주라는 말로 이해된다. 이렇듯 어떻게 보면 정반대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를 같은 단어로 쓰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다.
불교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라서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 능력은 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현대에 쓰는 시절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는 일이 생겼다.
한때 친한 사이였다는 것은 그 시기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뜻이다. 과거에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이거나, 같은 지역에 살아서 자주 만나거나,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 함께 근무를 하거나, 같은 취미활동의 멤버이거나, 엄마들의 경우라면 아이를 같은 교육시설에 보냈던 조건을 갖는다.
나와 잘맞는 사람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살면서 모든 사람을 다 만나보지 못하므로 결국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생활하는 반경 안에 있어야 한다. 가족들도 외국에 살거나 멀리 살면 자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멀어지기도 하니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그 시절 가까운 곳에서 함께 대화하고 위로했던 사람들과의 끈끈한 관계는 실제였다. 그러나 이 마음이 진실한지를 알려면 내가 동창들과 다른 일을 하게 되어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도, 다른 온라인 게임으로 옮겨도, 취미활동을 그만두어도, 아이들이 커서 다른 학교에 가도 그들과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면 된다. 이런 한계를 넘어 수십 년 동안 인연을 이어온 친구들이 있다면 그들은 시절인연이 아니라 평생의 인연이다.
나는 한때 중학교 교사였었다. 공립학교 교사는 4년마다 학교를 옮기니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들과 근무지가 갈린다. 세월이 지나면 어떤 분들과 시절인연인지 평생의 인연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마음이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동료가 아닌 자연인으로서도 관계를 계속하고 싶은지는 다른 문제이다. 이 한계를 알게 되면 나이가 들수록 정을 주지 않기도 한다.
내가 첫 학교에 부임하고 만난 선배 선생님들이 참 좋은 분들이었다. 근무가 끝나고도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고 방학 때 여행도 함께 하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어김없이 다른 학교로 나뉘게 되고 다들 일과 결혼과 육아에 바쁘게 되면서 만나는 횟수는 현격하게 줄었지만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나 일하는 엄마들의 부족한 시간과 몇 년 동안 외국에 나가게 되는 사정들이 겹치게 되며 연락이 끊겼다. 외국에서 돌아와 교육청에 문의를 해도 내가 퇴직을 한 상태라 그분들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너무 실망했지만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생각하고 포기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 그분들이 생각났다.
최근에 동네에 큰 연구 기관이 생겨서 기공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넓은 야외 식장에 앉아 있을 때 진행자가 내빈을 소개하는데 친숙한 이름이 들렸다. 선배 선생님의 동생의 이름이었다.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식이 끝나고 다가가니 세월은 한참 지났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거기서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당장 선배님에게 연락을 했다. 30여 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정겨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당장 만날 약속을 했다. 다시 만난 선배님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시간의 공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분들은 그때 그대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밖에는.
우리는 한때로 끝날 시절인연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불교적 의미의 시절인연이 떠오른다. 그리움을 놓지 않으면 때는 오는 것이다. 만나야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있다.
어렵게 다시 잡은 시절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절을 잘 누리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