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요새에 내리는 다정한 소란

부제 : 마흔다섯, 짝사랑이라는 비싼 도파민 지출

by관돌

본 내용은 [학교 과제]로 사전 제출 후, 게재한 내용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로 늦어질 거라곤 나 또한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삶에 영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십 대의 나는 그 누구보다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다. 소위 말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여겨질 만큼 기대와 동경이 컸던 그 꿈, 결혼. 그러나 현실의 나는 여전히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마음의 바구니 구석진 곳에서 뽀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때의 계획대로 삶이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아들일지 딸일지는 몰라도, 가끔 나와 마주 앉아 소주잔 정도는 쿨하게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부쩍 자란 앳된 성인이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식의 잔에 슬쩍 술을 채워주는 밤.

어쩌면 그런 사소한 일상을 소망했으나, 현실은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리는 중이다.


당연히 맞이할 줄 알았던 온기는 없고, 퇴근 후 문을 열면 오직 텅 빈 방만이 웃음기 없이 나를 정직하게 맞이할 뿐이다. 늘 그렇듯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자리에 드는 일상의 연속. 현관문을 열 때마다 쏟아지는 고요한 정적은 매일 마주하는 지극히 익숙한 풍경임에도 희한하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분위기는 여전히 문득문득 낯설고 서글프다. 방에 들어와 불도 켜기 전에 TV 리모컨부터 찾아 볼륨을 짐짓 높여버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실감 나지 않는 이 고요함을 가짜 소리로라도 어떻게든 와장창 깨트려보고 싶은, 나만의 소심한 몸부림인 셈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을 가뿐히 넘어섰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를 대하는 주위의 시선과 공기도 확연히 달라짐이 느껴진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여주던 시절에는

“결혼은 급하게 서두르는 것보다 천천히 하는 게 낫다, 일이 먼저지”라며 희망적인 조언을 건네는 이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내게 결혼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쉽게 꺼내지 못한다.

그것이 이 세계가 매너를 지키는 냉정하고 암묵적인 방식인 것 마냥.

가끔씩 가족들이 건네는 “살아보니까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 능력만 되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아”라는 말에는 나쁜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내 삶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다정하게 위로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 따스한 말들의 이면에서 나를 향한 그들의 ‘포기와 체념’을 너무도 선명하게 읽어내고야 만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버린 탓에 세상은 내가 당연히 누군가의 부모이겠거니 지레짐작하곤 한다.

“혹시 애가 몇 살이세요?”라는 불쑥 찾아온 질문 앞에서 나는 늘 잠깐 멈칫한다.

당황스러운 내 처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어떻게 말해야 나를 마주한 상대방이 덜 민망하고 무안할지를 먼저 머리 터지게 고민하게 되는 것.

그것이 마흔다섯의 싱글이 지닌 서글픈 배려이자 어른의 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주변의 시선이나 질문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혼자 사는 삶이 완벽하게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불편함이 단 1%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나는 나만의 단단한 '요새'를 성공적으로 구축해 가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홀로 자유롭게 지내온 탓에 이제는 누군가와 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함으로 다가올 정도가 되었다. 잠시 누군가를 만나 소란스럽게 웃고 나면 외롭지 않아 좋다가도, 그 시간이 조금만 길어지면 이내 '함께'보다는 다시 익숙한 나만의 '외로움' 속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혼자서도 원하는 요리를 뚝딱 차려내고, 워낙 깔끔한 성정 덕에 청소나 빨래도 나름의 재미로 삼아 해치우는 일상. 상대방의 기분 변화에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오롯이 내게만 집중하면 아무런 하자가 없는 평온한 세상이다. 내 인생에 '결혼'이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 같은 불편한 선택지는 더 이상 없다고 믿었다.


이 단단하고 철벽 같은 요새 안에서 평생 안전하게만 나이 들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예고 없이 이 확고하던 삶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호기심이 그 시작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내 평온한 일상 안으로 어떤 한 사람의 존재가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호감이나 호기심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평소 즐겨보는 연애 예능 프로를 보면서 ‘내 나이면 빼도 박도 못하고 고유 1번 영수겠지? 내 연애 세포는 이미 코마 상태인데……’라며 짐짓 선을 긋던 방관자의 태도를 유지해 왔다.

나의 단단한 요새가 고작 이 정도 바람 한 점에 흔들릴 리 없다고 자신하면서. 하지만 호기심이 차곡차곡 쌓여 마음의 벽을 넘어설 때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에 또다시 ‘짝사랑’이라는 지독한 소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씩 스무 살 청춘 시절에나 느끼던 도파민이 마구 터지는 기분이 들 때면, 심장이 간질거리면서도 동시에 덜컥 불안함이 밀려온다.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 세포들이 나도 모르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보다 두려움이 더 앞서는 건 아마 사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일 것이다.

이 나이의 사랑은 낭만보다, 내가 어렵게 구축해 온 일상의 평온이 무너지는 공포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지금의 나를 더 괴롭히는 건, 다름 아닌 내 '마음 챙김'에 대한 부분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고백을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그 상처의 무게가 너무도 무서운 것이다.

이십 대 때 가졌던 무모한 용기는 이제 사십 대의 이성 뒤에 묻혀버렸다.

거절의 여파가 예전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임을, 그 후유증이 내 단단한 요새를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뜨릴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오롯이 감내할 만큼 현재 느끼는 이 호기심과 사랑의 무게가 정말 큰 것인지, 솔직히 나조차 알 수가 없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참 유명하고 안전한 말이다.

이대로 고백을 하지 않고 마음을 접는다면 내 요새는 한 치의 균열도 없이 안전할 것이고,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세계를 뒤흔든 이 기적 같은 온기를 그저 구경만 하다 지나쳐야 한다.

반대로 행동을 취했다가 실패라도 하게 된다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을 것이다. 결국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침묵이냐, 부서질 것을 각오하고 요새의 문을 여는 소란스러운 고백이냐. 확률은 정확히 반반이다.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해도 결국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는 분명 남을 것 같다.


기분 탓일까.

문득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노랫말이 귓가에 울려 퍼진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답죠.’


딱 지금 내게 어울리는 말이다.

어쩌면 마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지금의 이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인생이 나에게 선사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소란일지도 모르겠다.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웅성거리는 TV 소리 사이로, 인생은 원래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거라며 위로하는 듯 흥얼거리는 달콤한 목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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