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왠지 모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그 앞에는 땀에 흠뻑 젖은 어머니가 서
계셨다. 양손에는 머리통만 한 수박을 들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 힘들었겠네요?"라는 다정한 말 대신,
“전화하지 그걸 왜 혼자 들고 오는데!” 라며 짜증스러운 첫마디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긴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다. 더운 날씨 속 왜소한 체구에 혼자 낑낑대며 양손으로
수박을 감싸 쥐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 순간 고마움 보단,
짜증이 먼저 났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그때 어머니가 들고 계신 수박을 재빨리 건네받지 않았을까?’라는 찐한 아쉬움도 남는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짜증을 내고 돌아선 순간, 신발도 미처 벗지 않은 채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시며 손에 들고 있던 수박을 욕조에 던져 버리셨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욕조는 물론, 흰 벽면과 거울, 변기 여기저기에는 마치 봉숭아로 물들인 것처럼 욕실 전체가 선홍빛
물결로 뒤덮였고, 간간히 까만색 점들도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 소리에 놀란 형도 방에서 뛰쳐나왔다.
“관돌아! 무슨 일이고? 어머니 왜 저러시노?”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해야 될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형아... 나도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났다. 아마도 억울함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그땐 너무 억울했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헐크처럼 변한 어머니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를 본체만체하시며 물 한 컵을 마신 후 다시 밖으로 나가셨다.
얼른 뒤따라 나갔지만, 역정을 내시며 오지 말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뒤를 더 쫓을 순 없었다.
그리곤 차를 타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셨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바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당연히 받지 않으셨다. 집으로 돌아와 형과 다시 그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니 진짜 별 말 안 했나? 그런데 어머니 왜 저러시지? 수박을 혼자 들고 오셔서 그런가?”
20대 남자 둘이서 머리를 맞대 보아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에는 없었지만, 같은 여자인 누나 찬스를 써보기로 했다.
상황 설명을 해주자, 누나가 답을 건넸다.
“너희 잘못은 없다. 그런데 아예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네.”
“응? 그게 무슨 말이고? 잘못이 있다는 거가 없다는 거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게 남자와 여자의 언어란 말인가?’
“그게 아니고... 어머니 아마 갱년기 오신 것 같은데... 호르몬 변화도 심할 거고, 더운 날씨에 너희들
줄라고 끙끙대면서 수박까지 들고 왔는데, 좋아하는 반응도 안 보였던 게 너네 잘못인 거고!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도 있는데, 갱년기다 보니 어머니 스스로 호르몬 변화도
심하고, 감정 조절이 안 되다 보니 당신도 모르게 격한 반응이 나온 거니깐 너희 잘못은 아닌 거지!
이제 무슨 말인지 좀 알겠나?”
솔직히 당시에는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어려웠다.
갱년기... 드라마나 영화로만 봤지, 실제 겪은 분을 보는 건 어머니가 처음이었다.
나뿐 아니라 형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 걸 보면...
“누나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노?”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네. 그냥 어머니한테 평소보다 부드럽게 얘기하고, 더 신경 써
드리는 것 외에는... 이건 어머니가 먼저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문제라서...
솔직히 나도 경험을 못 해봐서 어렵긴 한데 같은 여자니깐 이 정도는 아는 거지.
그래도 내가 옆에 있었으면 정서적으로 나마 좀 나았을 건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쉽네.
어머니 감정 변화 심할 수도 있으니깐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받아들여주면 덜 민망하시고 좀
나을 거다.”
그때, 처음 알았다. 갱년기가 얼마나 힘든지. 더군다나 어머니도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얼마나 힘드실까 라는 생각에 먹먹해졌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가장 잘 이해해 주실 아버지도 없는 상황.
같이 살고 있는 20대 중반 두 아들은 갱년기에 ‘갱’자도 모르는 무지한 녀석들이었기에 얼마나 갑갑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다행히 그 일이 있은 후, 어머니도 갱년기를 잘 받아들인 덕분에 감정 컨트롤도 제법 잘하셔서 갱년기는 어느 순간 잘 넘어간 듯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어느덧 나 또한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갱년기를 겪어도 이질감이 없는 나이에 이르렀다.
항상 긴장이 된다. 어쩌면 그 경험이 예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길을 걷다 보면 ‘수박’을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계절이 되었다.
'수박'
누군가에겐 달달한 과일이지만,
나에겐 왠지 죄바카라감이 먼저 들게 만드는 오묘한 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