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은 털렸지만, 국뽕은 남았다

(£45 벌금내고 만난 “조선미녀”)

by류정uk



영국 시골 마을 브로드보텀(Broadbottom).


인구 천 명 남짓한 이 작은 마을 슈퍼마켓 맨 앞줄에 고추장과 된장이 나란히 진열된 걸 본 날, 나는 처음으로 '국뽕'이라는 단어의 실체를 느꼈다. 한국인은 나 하나뿐인 동네인데, 좁은 선반 한 칸을 조선의 장류가 당당하게 접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슈퍼를 지날 때마다 괜히 고추장에게 목례를 건넨다. 된장에게는 가볍게 눈인사만 한다. 엄연히 서열이라는 게 있으니까.

국뽕이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툭 튀어나와 사람을 뿌듯하게 만드는 감정인가 보다.

그런데 오늘, 하늘 위에서 그 감격의 시즌 2가 개봉했다.


조카 준이가 밀라노로 파견을 가게 된 덕분에, 나는 루턴 공항에서 위즈에어(Wizz Air)를 타고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밀라노로 향하는 중이다. 설렘 반, 원망 반, 그리고 통장 잔고 걱정 한 스푼.


사건은 어젯밤부터 시작됐다. 칠십 대 노안으로 온라인 체크인과 두 시간 동안 사투를 벌였다. 휴대폰을 붙잡고, 노트북을 들이밀며 화면을 확대했다 줄였다 하기를 수십 번. 눈알은 시멘트처럼 굳어갔지만, 앱은 끝내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당신은 우리 항공사와 인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사십 년 전 이 나라에 처음 내렸을 때부터 인연이었던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같이 공항으로 나갔다. 네 시간 전부터 줄을 섰고,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직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온라인 체크인 안 하셨네요. £45입니다."


끝이었다. 미소도, 사과도 없었다. 마치 그 £45가 원래부터 자기 돈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청구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속에서 돌이 굳더니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허공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지나가던 비둘기조차 슬쩍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비둘기마저 나를 피하다니. 새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이 났나 보다.


'저 동양 할머니, 오늘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분노를 가득 품은 채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방금 전까지 저주하던 이 항공사가, 세 시간 뒤 내게 '조선미녀'를 선물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기내 잡지를 스르륵 꺼냈다. 그리고 표지에 눈이 딱 멈췄다.


표지 한가운데 당당히 자리 잡은 브랜드 이름, 'Beauty of Joseon(조선미녀)'.


내 눈을 의심했다. 다음 장을 넘겼을 때는 무려 프랑스의 자존심 '랑콤'과 나란히 서 있는 한국 화장품이 실려 있었다. 한동안 그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자리 승객은 내가 무슨 경전이라도 읽는 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랑콤아, 미안하다. 오늘은 네가 조연이다. 다음 생엔 주연시켜 줄게.


사십오 년 떠돌이 인생 동안 130여 개국을 다녀봤지만, 외국 항공사 카탈로그 한가운데를 한국 화장품이 이렇게 당당하게 차지한 건 처음 본다. 그것도 국적기도 아닌 헝가리 저가항공에서 말이다.


방금 전까지 이 항공사를 저주하던 내가 맞나 싶었다. 역시 애국심 앞에 자존심 따위는 없다. 마침 오늘 아침, 한국 친구 순득이가 챙겨준 선크림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던 참이었다. '이거 다 쓰면 어디서 국산을 구하나…' 하던 바로 그 순간, 하늘 위에서 조선의 화장품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아닌 K-뷰티가 나를 구원하러 오신 거다. 망설임 없이 £20을 내고 집어 들었다. £45 벌금을 낸 지 세 시간 만에 또 £20을 쓰다니. 오늘 이 항공사, 내 지갑을 제대로 노리고 있다. 이쯤 되면 위즈에어는 항공사가 아니라 나의 재정 코치다.


"돈은 이렇게 쓰는 겁니다, 고객님."


그래도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뜨거워졌다. 지갑은 얇아졌는데 애국심은 두꺼워졌다. 이런 밑지는 장사가 또 있을까.


이 정도면 £45 벌금, 용서해 줘도 되지 않을까?


……


아니, 못 한다.

감격과 원칙은 별개다.

노안에 기계치인 죄로 두 시간을 씨름한 대가가 £45라니, 이건 체크인이 아니라 유료 미션이었다.

다음엔 손주라도 빌려와야겠다.

£45는 날아갔지만, 국뽕은 남았다.


오늘의 손익계산서는 이렇게 마감.


계산은 안 맞아도, 기분은 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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