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빚, 다른 강 - 그리고 scone)
낙동강 이야기를 쓴 죄로, 일주일 동안 전사자 명단과 씨름했다.
밤에는 나무위키, 낮에는 참전 기록, 새벽에는 유튜브의 “6.25 다큐 몰아보기”.
알고리즘이 나보다 내 주제를 더 잘 아는 지경이었다.
친구들이 “요즘 뭐 해?”라고 물으면, 나는 거의 국사편찬위원회 임시직원처럼 대답했다.
“어… 전쟁 좀 보고 있어요.”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 지금 한국사 파다가, 왜 하이랜드로 가고 있지?”
답은 없었고, 그냥 운전대를 잡았다. 어디라도 씽, 씽.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은 Broadbottom이다.
그렇다. 직역하면 ‘넓은 엉덩이’다.
친구들에게 설명할 때마다 나는 진땀을 흘린다.
“아니 그러니까, 그냥… 엉덩이가 넓어서…”
결국 매번 “지도에서 검색해 봐”로 도망친다.
그 위대한 엉덩이 마을에서 Fort George까지는 편도 7시간.
가는 길엔 GPS와 실제 도로 사이에 늘 ‘정중한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도 새삼 배웠다.
직진하라는 GPS의 말과 달리, 눈앞에는 양 떼들이 멀뚱멀뚱 회. 의. 중.
역사적 부채를 갚겠다고 나선 순례길 치고는, 출발부터 코미디였다.
세상이 온통 전쟁 이야기로 가득한데, 내 머릿속까지.
뿌리를 끝까지 파헤치고 마는 이 성질 때문에, 나는 아무 죄 없는 스코틀랜드 국도를 인질로 잡고 달리고 있었다.
웃기기만 했던 세계가 어느 순간 조용히 나를 내려 앉히기 시작했다.
장대하게 펼쳐지는 요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
Fort George.
18세기 중반에 지어져 지금까지도 군인들이 실제로 상주하는 현역 요새.
세상에서 제일 큰 요새가 뭔지도,
화장실이 영어로 ‘latrine’이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우리는 영어를 중1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 60년째 붙들고 온 세대다. 그 긴 세월 끝에 오늘 건진 단어 하나.
하필이면 화장실이라니…
그래도 괜찮다.
7시간 운전해서 얻은 수확이니,
이 정도면 평생 안 잊을 ‘고급(?) 어휘’ 하나 장만한 셈이다.
겉으로는 오래된 요새지만, 안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박물관을 천천히 돌다가, 숫자 하나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제1차 세계대전 4년 동안,
잉글랜드를 제외하고 스코틀랜드 사람들만 3만 명이 이곳에 모였다.
10대와 20대, 그리고 중년의 남자들까지.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바다를 건너 전쟁터로 떠났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14,303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거의 절반이었다.
그 숫자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자기 동네 이름으로 농담을 하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음이 그렇게 순식간에 꺼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숫자를 읽는 순간, 얼마 전 대학 친구 Karla가 내 영어판 낙동강 글에 남긴 댓글이 떠올랐다. 평소엔 역사 얘기가 나와도 시큰둥하던 친구인데, 그날은 유난히 길었다.
한국전쟁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자기 할아버지 세대 얘기로 넘어가 있었다.
“유럽 전선에서 싸운 그 청년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독일어를 쓰고 있을거야”
처음 읽었을 땐 솔직히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럼 나는 Broadbottom을 Breitboden이라고 불러야 했나.”
하지만 그 요새 역사관 안에서는,
그 농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름과 나이가 적힌 명단,
사진 속 앳된 얼굴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절반의 자리.
낙동강에서 열일곱, 열여덟의 학도병들이 총을 들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같은 선택을 했다.
그때 낙동강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 강이 아니었을 것이다.
1950년 여름, 물빛보다 화약 냄새가 더 짙었을 것이고,
강을 건너던 소년병들의 군화 속에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발이 있었을 것이다.
교복을 벗은 지 몇 달도 안 된 몸으로,
총이 바카라가방보다 무겁다는 걸 그 여름에 처음 배운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도 위에서는 낙동강과 Fort George 사이에
대륙 하나와 바다 하나가 놓여 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그 거리가 이상할 만큼 좁아진다.
그날이 그랬다.
⸻
Fort George를 나서면 바로 북해가 펼쳐진다.
그 바다 건너에는 북유럽이, 그리고 그 아래로 독일이 있다.
박물관 카페에서 scone을 하나 사 먹으며,
나는 한참 바다를 바라봤다.
(여긴 뭘 하든 scone이 따라온다.
심지어 국가안보시설에서도. 영국이란 원래 이런 나라다.)
한 세기 전, 이 물길을 얼마나 많은 배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실어 날랐을까.
그 생각을 하자, 풍경이 달라 보였다.
한 손에는 애도,
한 손에는 clotted cream이 발린 scone.
낙동강도 그랬다.
지금은 그저 바람이 불고 물안개가 감싸는 평화로운 풍경일 뿐이다.
그 아래 무엇이 흘러갔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강 하나, 바다 하나.
이름도 언어도 다르지만,
그 밑에 놓인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낙동강에 대해 썼을 때,
나는 그 빚을 갚을 방법이 없다고 -
다만 잊지 않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썼다.
Fort George의 전시실을 나오며,
나는 같은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3만 명 중 1만 4천여 명.
통계로 보면 그저 비율일 뿐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첫사랑이었고,
누군가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
그 숫자는 더 이상 비율이 아니다.
낙동강에서 그랬듯,
Fort George에서도,
그 숫자 하나하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식탁 위에 돌아오지 않은 자리였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