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루 종일 낙동강만 들여다보았다. 밥때가 되었다는 것도, 해가 기울었다는 것도 잊은 채. 옆에서 보면 아마 낙동강에 무슨 원수라도 진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난 목요일, 「낙동강, 그 여름에 진 빚에 대하여」를 발표했고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다. 온라인카지노의 작가님들께서도 따뜻한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그것은 한국 독자분들이 직접 읽으실 수 있으니 여기서는 옮기지 않으려 한다. 대신 오늘은 그 글이 국경을 넘어 닿았던 자리들, 그리고 애초에 이 시리즈를 쓰게 만든 한 편의 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해암님의 시 한 편에서 시작되었다. 낙동강에서의 죽음을 노래한 그 시를 읽고, 나는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시 한 편이 나에게 그 여름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셈이다.
나는 온라인카지노에 쓴 글들을 대부분 같은 내용으로 번역해 Substack에도 올린다. 영어판 온라인카지노인 셈이다. 그 글에 한 미국 독자가 이렇게 댓글을 남겼다.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처연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나눠줘서 고마워요.”
내 답변은 이랬다.
“고마워요, Steve. 딱 그 균형을 바랐어요 - 슬픔과 다정함이 나란히 있는 것. 저에게 이 빚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깊은 고마움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전해졌다니 기쁩니다.”
영국 친구 Karla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언급하며 답했다. 그 용감한 청년들이 폭정에 맞서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모두 독일어를 쓰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바로 어젯밤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 우유를 사러 나갔다가 붙잡혀 강제로 군에 끌려간 남자친구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렇게 댓글을 맺었다.
“Lest we forget!”
잊지 않기 위하여!
나도 맞장구를 쳤다.
“고마워요, Karla. 맞아요 - 결국 같은 빚이에요, 단지 다른 강일뿐이죠. 그 우크라이나 여성의 이야기가 이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으로 끌어오네요.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1950년의 그 십 대들처럼 누군가 끌려 나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기억이 중요한 거겠죠.
Lest we forget, 정말로요.”
또 한 분의 미국인 친구 Dave는 이메일로, 250년 전, 7월 4일의 미국 독립 - 자기 나라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남겼다.
“고마워요, Dave. 맞아요 - 250년이든 75년이든, 시간이 그 빚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않네요. 오히려 그렇게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 일이 한순간이 아니라 대를 이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겠지요. 우리 모두, 다른 세기의 같은 젊음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네요.”
Steve, Karla, Dave. 서로 다른 언어와 나라에서 왔지만, 결국 같은 빚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라인카지노의 작가님들 댓글 역시, 같은 땅에서 또 다른 결로 그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
---
그 감정을 품은 채, 나는 낙동강과 관련된 모든 YouTube 영상을 찾아보고,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며칠을 그렇게 파고들다 보니, 알고리즘은 나를 한국전쟁 역사학자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추천 영상이 온통 전쟁사뿐이었다.
조금 우스웠지만, 동시에 그 기록들 속에서 내가 인간적인 무언가를 얼마나 절박하게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낙동강 전투를 그저 ‘치열했다’는 한 문장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록을 하나둘 찾아보니, 북한군은 남침 35일 만에 낙동강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문장을 읽는데 손끝이 저릿했다. 35일.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라의 운명이 이 강 하나에 걸리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전까지 이어진 이 전투는 한국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나는 그동안 ‘치열했다’는 말속에 얼마나 많은 것을 뭉개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특히 마음이 내려앉은 대목은 다부동 유학산 전투였다. 인명 손실이 커 연대본부의 빈자리를 여학생들이 지원하여 채웠다고,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는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다. 해암님이 공유해 주신 자료 속 전사자 3,409명 - 어제까지 나에게 그저 숫자였던 그 안에, 이름 모를 여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라 사람이 되었다.
또 하나. 급히 동원된 청장년들에게 가족을 만나고 돌아올 시간을 주었음에도, 대부분 도망치지 않고 다시 집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쇼는 거의 없었다고. 그 시절 사람들이 짊어졌던 바카라임감의 무게는, 지금의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암님이 남겨주신 자료들을 읽고 나는 댓글로 답했다. 내가 알던 낙동강 전투가 얼굴 없는 통계였다면, 이 자료들은 그 통계에 사람을 되돌려준 것 같다고. 유엔군으로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했다는 사실도 읽고 나니, 그 여름을 지켜낸 것이 결코 우리만의 힘이 아니었음을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
나는 봄과 가을이면 밀양에서 지내며, Servas 평화단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이제는 그들과 함께 낙동강변을 걸을 때, 강물이 아니라 그 여름을 함께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의 나라에서 온 청년도, 그해 이 강가에서 스러졌을지 모르니까. 다음에 한국에 가게 된다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에도 꼭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루를 강물과 함께 흘려보내고 나니,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바꾼 것 같았다.
숫자였던 것들이, 오늘 하루, 얼굴이 되었다.
———
낙동강 관련기사 영어버전입니다
https://open.substack.com/pub/chungryue/p/the-day-the-numbers-grew-faces?r=77zgyc&utm_medium=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