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 머무는 자리

by류정uk

어떤 인연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피를 나눈 것도 아니고, 같은 하늘 아래 자란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 그 사람이 거기 있다. 내 삶의 한복판에, 오래도록


사십오 년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짐 속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가슴에 안고서. 말도, 음식도, 계절의 냄새도 다른 나라에서, 나는 천천히 다시 나를 만들어갔다. Gina 이모는 그보다 훨씬 전에 아일랜드를 떠나 이 땅에 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바다를 건넌 사람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만났다.


며칠 전, 그녀가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버텼다.


아직도 그녀는 거기 있다. 세 아들에게 둘러싸여, 스티브 내외의 손길 속에서. 매일 전해오는 소식에는 눈물 같은 희망이 담겨 있다.


삶은 끝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나는 요즘 배운다


그녀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혼을 하고도, 세월이 바뀌어도, 우리 사이의 정은 끊어지지 않았다. 정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한번 들어오면 쉽사리 나가지 않는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결혼 초, 영국에서 이웃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던 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찾아와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한마디 했다. "그까짓 것." 그 짧은 말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한 바다를 건너온 아일랜드 여자와, 또 다른 바다를 건너온 한국 여자.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고향을 등진 사람만이 아는 그 쓸쓸함을, 그리고 그것을 딛고 살아내는 법을.


이제 그녀는 여든다섯이다. 이별을 생각하게 되는 나이.


지난 시간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녀를 보러 가던 긴 기찻길, 함께 먹던 밥,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웃던 오후들.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사랑으로 둘러싸인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깨닫는다.


삶의 무게는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라고.

마지막 순간, 곁에 누가 있느냐로 재는 것이라고.


정은 혈연을 따르지 않는다. 국경도 넘고, 이별도 견디고, 세월도 이겨낸다. 기억 속에, 변치 않는 마음속에,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그 마음속에 살아 숨 쉰다.


서로 다른 섬에서 온 두 여자가, 낯선 땅에서 서로에게 고향이 되어주었다.


한(恨)도 있었다. 그리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정이 쌓였다.


오늘도 소식이 왔다.


나는 잠시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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