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김치 국물로 키운 뼈와 온돌 체질 할매의 안데스 밤)
9월 25일 추석 아침, 쿠스코에서 씀
「딸이 사준 슬리퍼」에서는 슬리퍼 한 켤레로 잉카 제국을 정복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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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에서 제 뼈는 김치 국물로 키운 과자 같은 뼈라고 살짝 말씀드렸지요. 오늘은 그 뒷이야기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3화에서 잠깐 말씀드렸죠. 어린 시절 제 별명은 '깜불'이었다고. 저는 그 이름으로 천덕꾸러기처럼 자랐습니다.
없는 살림에 맨날 먹은 게 뭐였겠습니까.
김치, 그리고 보리밥.
슬리퍼 편에서 말씀드린 바로 그 메뉴입니다. 그런데 그 단조로운 식탁에도 일 년에 딱 하루, 특별한 날이 있었습니다.
생일날 제일 잘 받아 봐야 보리밥 대신 하얀 쌀밥 한 그릇. 그것도 생일이라고 보물처럼 소복소복 쌓아 올린 고봉밥이었습니다. 그 위에 올라앉은 계란프라이 하나, 오뎅볶음 조금. 그게 제 생일상의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 인생 첫 등정은 마추픽추가 아니라, 생일날 고봉밥이었습니다.
우유요? 구경도 못 했습니다.
초콜릿이요? 그건 남의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제 과자 같은 뼈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우유 대신 김치 국물로.
그리고 신기한 건, 저는 지금도 그 하얀 친구를 못 마십니다. 어릴 때 못 만난 친구는 어른이 돼서 만나도 끝내 서먹한가 봅니다.
마셔 보긴 했습니다. 뼈에 좋다니까. 큰맘 먹고 한 잔 - 쭉.
그 결과는요?
뽕. 뽕. 뽕뽕.
제 몸은 우유를 마시면 흡수는커녕 뒤로 다 빠집니다. 뼈로 가야 할 칼슘까지 전부요. 우유 한 잔 마셔 봤자 뼈는 그대 로고, 주변 사람들만 멀어지죠.
그런데 초콜릿 하고는 다릅니다.
2화에서 고백했지요. 크루즈 자정 디저트 뷔페에서 초콜릿 분수 앞에 줄을 섰다고.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건 그냥 줄이 아니었습니다. 70년 묵은 한풀이 줄이었습니다. 깜불이가 못 먹고 자란 초콜릿을, 칠순 할매가 분수로 받아먹은 겁니다. 청바지 단추가 뻑뻑해진 건 식탐이 아니라 역사적 보상이었습니다.
우유와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지만, 초콜릿과는 늦게나마 아주 뜨겁게 화해했습니다.
뼈는 약하게 자랐지만, 그 뼈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일날 계란프라이 하나에 행복하던 그 아이가, 칠순에 마추픽추를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 여행 가방에는 운동화 말고 또 하나의 동반자가 있습니다.
한국산 소파용 초소형 전기요.
저는 이걸 세계 어디든 들고 다닙니다. 추운 걸 정말 못 참거든요. 등이 따뜻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잡니다. 46년을 타국에서 살았어도 제 등은 여전히 온돌 체질입니다. 국적은 바꿔도 등짝은 못 바꿉니다.
낮에는 태양신이 데워주셨지만, 안데스의 밤은 춥습니다. 그래도 저는 끄떡없었습니다. 콘센트 하나만 있으면 페루 호텔방이 순식간에 한국 찜질방이 됩니다. 아마 그 호텔 역사상 처음이었을 겁니다. 잉카 땅에서 전기요 깔고 지지는 손님은.
생각해 보니 제가 머물렀던 마을 이름이 '뜨거운 물'이라는 뜻의 아과스 칼리엔테스였죠. 그래서 필명도 아쿠아 알리칸테로 지었고요.
칼리엔테가 어쩌다 스페인 휴양지 알리칸테가 됐냐고요? 아과스까지 합쳐서 칠순 할매 혀가 좀 꼬였습니다. 혀도 뼈처럼 자기가 붙고 싶은 자리에 붙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보니 저한테 필요한 건 뜨거운 물이 아니라 뜨거운 요였습니다. 필명을 다시 바꿔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칠순의 한국 할매가,
김치 국물로 키운 과자 같은 뼈를 달고,
슬리퍼로,
버스를 타고,
화창한 마추픽추에 올라 누가 원시적인지 재던 저울을 내려놓고,
밤에는 전기요 위에서 지지고,
추석 아침엔 라면을 먹었습니다.
이게 제 마추픽추 완주 기록입니다. 등반은 안 했지만 완주는 했습니다.
누가 물어봅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거기까지 갔냐고.
저는 대답합니다.
버스 타고요.
젊었을 땐 뭐든 제대로 갖춰야 떠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좋은 신발, 좋은 체력, 좋은 타이밍. 그런데 그걸 다 기다렸으면 저는 아직도 영국 소파에 앉아 '올해는 가볼까?' 하고 있었을 겁니다.
잉카 사람들은 바퀴 없이도 구름 위에 도시를 지었습니다. 저는 운동화 한 번 안 신고 그 도시를 보고 왔습니다.
1화에서 갈매기들을 제 관중으로 정했었죠. 이번 여행의 마지막 관중은 가방 속 운동화로 정하겠습니다. 한 번도 신지 못했지만, 끝까지 따라와 준 의리 있는 녀석이니까요.
여러분도 뭔가 망설이고 계신다면, 일단 슬리퍼 신고 나가 보세요.
추우면 전기요 챙기시고요.
배고프면? 네, 라면입니다.
추석날 아침, 쿠스코 창가에서 매콤한 라면 국물 사발째 마시며.
전기요는 여전히 제 시린 무릎을 덮고 있습니다.
- 아쿠아 알리칸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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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고 응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제 어설픈 이야기가 여러분의 바쁜 일상 속에 작은 웃음 하나, 따뜻한 온기 한 조각 남겼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참, 원래 제 전기요를 펼 다음 장소는 라파스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 영국에 와 있습니다.
급하게 안데스에서 영국으로 날아간 사연은
「 비행기 다섯 번, 슬리퍼 한 켤레」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