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번외 편] feat. 할매 인생은 혼자 인생이 아니라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저는 지금쯤 한국에 있어야 합니다.
쿠스코에서 볼리비아 라파스로 넘어가 호수를 보고, 한국으로 들어와 가을을 맞을 참이었습니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고향 밀양 집 문을 열어 세계 각국 여행객들을 공짜로 재우고 먹입니다. 설거지만 좀 도와 달라고 하지요. 종교는 없지만, 내 집에 들어온 낯선 이들과 밥 한 끼 나누는 일이 제가 세상에 내는 십일조쯤 됩니다.
올가을에도 남미를 한 바퀴 돌아 그 문 앞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머물겠다는 요청도 벌써 몇 개나 줄을 서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영국에 있습니다. 호수와는 반대 방향으로, 아주 멀리 돌아서 왔습니다.
쿠스코에서 짐을 싸던 중이었습니다. 둘째 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위 일 때문에 뉴욕과 맨체스터를 오가며 사는 아이입니다. 새로 산 집에 문제가 생겨 큰 공사를 앞두고 있는데, 업자들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집이야 천천히 고치면 되지만, 지친 마음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엄마는 세상 반대편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습니다.
자녀 셋, 손주 다섯, 그리고 20년째 직접 꾸려 온 세입자들. 세다 보면 식구가 몇 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결정은 언제나 이 할매 몫입니다.
남들 눈엔 혼자 세상을 떠도는 유랑자 할매처럼 보여도, 제 기내 가방엔 늘 식구들이 같이 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할매 인생은 혼자 인생이 아닙니다.
짐을 싸던 손이 잠깐 멈췄습니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이번엔 라파스가 아니라 런던으로 가는 짐이었습니다. 라파스도 접고, 호수도 접고, 한국의 가을도 접었습니다. 밀양 집 문을 두드릴 여행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엄마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칠십 평생 접어 본 것 중에 제일 빨리 접었습니다.
출발 이틀 전에야 비행기표를 찾았습니다. 급하게 끊는 표가 쌀 리 없지요.
문제는 제가 돈 쓸 줄 모르는 할매라는 겁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4~5파운드 내는 일은 죽어도 못합니다. 명품 가방 하나 값이면 밀양 집 손님 밥이 몇 끼인가 계산부터 하고, 옷은 웬만하면 중고 가게에서 사 입습니다.
리마에서 런던 가는 직항은 없습니다. 암스테르담을 한 번 거치는 표가 900파운드였습니다.
다른 표도 있었습니다. 쿠스코–리마–파나마–퀴라소–암스테르담–런던 루턴. 비행기 다섯 번, 공항 여섯 곳, 꼬박 이틀.
값은 550파운드.
마음은 급한데, 손가락은 이미 550파운드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차이는 350파운드. 스타벅스 커피로 치면 칠십 잔이 넘는 돈입니다. 평생 사 마시지도 않을 커피 칠십 잔을 한 번에 번 셈이지요. 물론 번 돈으로도 안 사 마실 겁니다.
둘째에게는 문자 한 줄만 보냈습니다.
"엄마 간다. 이틀 걸린다."
다들 이틀이나 걸려서 어떡하냐고 걱정하시겠지요.
사실 저는 원래 공항 체질입니다. 칠십 넘은 무릎은 10시간이 넘으면 파업을 하니, 공항마다 내려서 쉬어 가는 쪽이 몸에 맞습니다. 그래서 제 규칙은 하나입니다.
"10시간 넘는 비행기는 절대 안 탄다. 비즈니스 타고 누워 가는 거면 몰라도."
900파운드짜리 표는 리마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열두 시간 넘게 날아가야 했습니다. 550파운드짜리 표에서 제일 긴 비행은 퀴라소에서 암스테르담까지 9시간. 딱 한 시간 차이로 제 규칙을 지켰습니다.
이 정도면 노선을 제가 짠 게 아니라 하늘이 짜 준 겁니다.
비밀은 따로 있습니다. 어느 공항에서든 라운지 문을 열어 주는 카드 한 장. 제 진짜 여권은 카드사에서 준 그 카드입니다.
부치는 짐도 없습니다. 기내 가방 하나가 제 짐도 나르고, 할매의 지팡이도 됩니다. 손잡이에 기대면 절뚝이는 다리가 든든해지고, 발통 네 개가 돌돌 구르는 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가방 안에는 운동화가 모셔져 있지만, 꺼낼 일은 없습니다.
운동화는 짐 담당, 걷는 건 슬리퍼 담당입니다.
보안 검색대에서 다들 끈 풀고 운동화 벗느라 줄이 밀리는데, 저는 큰딸이 사 준 슬리퍼를 툭 벗고 통과했습니다. 이 구간만큼은 제가 일등이었습니다.
큰딸이 이걸 알고 사 줬다면 천재고, 모르고 사 줬다면 운이 좋은 겁니다.
이건 둘러 간 게 아닙니다. 할매 맞춤 직항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슬리퍼를 끌고 라운지로 직행합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고, 소파에 기대 한숨 자고, 온라인카지노 글도 씁니다. 어떤 곳에서는 샤워까지 했습니다. 낯선 공항인데도 라운지 문만 열면 내 집 거실 같습니다.
소파에 앉을 때마다 둘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 지금 리마."
"엄마 지금 퀴라소."
딸은 퀴라소가 어디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사실 저도 표를 끊으면서 처음 알았거든요.
핸드폰 음성 입력은 파나마를 자꾸 '바나나'라고 받아 적더군요. 남미에 오래 있었더니 핸드폰도 배가 고픈가 봅니다.
답장은 매번 짧았습니다.
"응, 엄마. 조심히 와."
그 한 줄을 받을 때마다 다음 비행기로 가는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졌습니다. 둘째에게 가는 길, 제 발에는 큰딸이 사 준 슬리퍼가 신겨 있었습니다.
이틀 동안 저는 라운지 몇 곳을 느긋하게 옮겨 다녔습니다.
단, 한 곳만 빼고요.
그곳에서는 느긋할 틈이 없었습니다. 환승 시간이 고작 39분이었거든요.
슬리퍼를 신은 할매가 파나마 공항을 질주합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아쿠아 알리칸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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