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사준 슬리퍼 - 마추픽추 종결 편 (중)

(feat. 가방 속 운동화의 남미 일주)

by류정uk

9월 25일 추석 아침, 쿠스코에서 씀


지난 편에서 마추픽추 돌담 앞에 저울은 내려놓고 왔는데, 운동화는 끝내 못 놓고 왔다고 말씀드렸죠. 오늘은 그 운동화 이야기입니다.


제 마추픽추 이야기가 남들과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 위대한 잉카 유적을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녔습니다.


9월 5일 영국을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저는 슬리퍼 말고는 한 번도 신어본 신발이 없습니다. 카리브해 크루즈 갑판에서도 슬리퍼, 리마에서도 슬리퍼, 쿠스코 고산에서 코피 쏟을 때도 슬리퍼, 그리고 잉카 성채에서도 슬리퍼.


물론 운동화도 챙겨 왔습니다. 혹시 몰라서요.


그 운동화는 지금 제 가방 속에서 3주째 남미 일주 중입니다. 카리브해도 건너고, 안데스도 넘고, 마추픽추까지 다녀왔는데 땅은 한 번도 안 밟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팔자 좋은 운동화입니다. 저보다 여행을 편하게 하고 있어요.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골다공증이 심합니다. 그래서 뼈를 네 번이나 부러뜨렸습니다.


처음엔 갈비뼈.

그다음엔 등뼈.

발목.

마지막으로 발등뼈.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곡차곡 내려왔습니다. 제 뼈들이 무슨 계단을 내려가듯 질서 정연하게 부러진 겁니다. 잉카 돌담 못지않은 질서 의식입니다.


발등까지 왔으니 이제 더 내려갈 데도 없습니다. 골절 인생도 드디어 바닥을 찍었습니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물론 버스 타고요.


제 뼈는 아마 전생에 과자였던 모양입니다.


그 마지막 발등뼈는 두 개나 부러졌는데, 영국 의사 선생님들이 참 느긋하시더군요.


"가만히 있으면 붙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해주셨습니다.


뼈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붙긴 붙었습니다. 다만 제자리가 아니라 자기가 붙고 싶은 자리예요. 영국 생활 41년 만에 깨달았습니다. 영국은 뼈도 '알아서 하세요' 주의라는 걸.


그 뒤로 제 발은 운동화를 거부합니다. 신으려고 하면 아프고 발이 말합니다.


"할매, 그건 안 돼."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이 발에게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크루즈를 타면 뾰족구두를 신고 밤이면 탱고를 췄습니다. 조명 아래서 또각또각, 턴 한 번에 치맛자락이 휘날리던 그 발이 바로 이 발입니다.


그런데 이번 크루즈에서 이 발이 한 일이라고는 슬리퍼 끌고 뷔페 줄 서기, 그리고 자정 초콜릿 분수 앞까지 걸어가기가 전부였습니다.

탱고 대신 케이크, 턴 대신 리필.


더 기가 막힌 건, 탱고의 고향이 바로 여기 남미라는 겁니다. 탱고를 배우던 할매가 드디어 탱고의 대륙에 왔는데, 신발장에는 뾰족구두 대신 슬리퍼 한 켤레뿐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쪽에서 들으면 섭섭할 일입니다.


뾰족구두 신고 탱고 추던 그 시절은 이제 옛날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 발로 탱고도 춰봤고, 이제 그 발로 마추픽추도 밟아봤으니까요. 신발만 바뀌었을 뿐, 발은 여전히 무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슬리퍼입니다.


그런데 이 슬리퍼, 그냥 슬리퍼가 아닙니다. 큰딸이 사준 슬리퍼입니다.


사줄 때만 해도 몰랐을 겁니다. 이 슬리퍼가 카리브해를 건너고, 안데스를 넘고, 잉카 제국까지 가게 될 줄은. 동네 마트 다녀오라고 사준 슬리퍼가 세계 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슬리퍼 인생도 주인 잘 만나면 이렇게 출세합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땐 제가 딸아이 신발을 사 신겼는데, 이제는 딸이 사준 신발을 신고 엄마가 세상 구경을 다닙니다.


영국에서 페루까지,


슬리퍼 한 켤레로,


잉카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지난번엔 정복은 아니라고 했지만, 슬리퍼로 치면 정복 맞습니다.


이쯤 되면 슬리퍼 회사에서 광고 제의가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라면 홍보대사에 이어 슬리퍼 홍보대사까지, 모델료는 안 받겠습니다. 딸이 이미 선불로 냈으니까요.



아무도 할매 발을 안 봅니다. 젊었으면 창피해서 못 했을 일을, 칠순은 슬리퍼 끌고 당당하게 해냅니다.



슬리퍼 신은 단 한 사람


마추픽추는 하루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 수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그 많은 사람 중에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등산화, 운동화, 트레킹화 사이에서 딸이 사준 슬리퍼 한 켤레.


이것도 나름 한정판입니다.


그리고 슬리퍼 덕분에 제일 느리게 걸은 사람도 저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남들 지나친 돌담 하나하나에 다 인사하고 왔습니다.



딸아, 네가 사준 슬리퍼가 엄마를 마추픽추까지 데려다줬다. 이 정도면 효도 중에 상 효도다.



(마지막 편에서 계속됩니다. 가방 속 또 하나의 동반자, 전기요 이야기입니다.)


- 아쿠아 알리칸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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