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슬리퍼 신은 할매와 잉카의 돌담)
9월 25일 추석 아침, 쿠스코에서 쓴 글입니다
아과스 칼리엔테스에서 부친 마추픽추 특별 편, 잘 받으셨지요? 오늘은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추석날 아침, 저는 쿠스코로 돌아왔습니다.
버킷리스트 1번, 마추픽추. 드디어 끝냈습니다.
그리고 추석 아침상은요?
송편도 아니고, 토란국도 아니고, 컵라면 한 그릇이었습니다.
네, 또 라면입니다.
마추픽추 여행기의 시작도 라면, 끝도 라면. 이쯤 되면 이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라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상님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차례 지내러 오시기엔 비행기 값이 너무 비싸지요?
그런데 여러분, 먼저 고백할 게 하나 있습니다.
저는 마추픽추를 '등반'하지 않았습니다.
'정복'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관람'했습니다.
아과스 칼리엔테스에서 버스 타고 올라갔다가, 버스 타고 내려왔습니다. 잉카인들이 돌덩이를 등에 지고 오르던 그 길을, 저는 에어컨 빵빵 나오는 버스로 창밖 구경하며 올랐습니다. 잉카의 신들이 보셨다면 한 말씀하셨을 겁니다.
"저 할매는 뭔데 앉아서 오노?"
신이시여, 칠순입니다. 저 좀 잘 봐주세요.
버스에서 내려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걸었을 때였습니다.
사진으로 수백 번은 본 그 풍경이 눈앞에 딱 펼쳐졌습니다.
그날 하늘은 그야말로 쨍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뾰족한 봉우리와 산등성이에 얹힌 돌의 도시, 층층이 깎아 만든 계단식 밭까지 전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마추픽추는 안개가 끼면 한 치 앞도 안 보여서, 비싼 돈 내고 올라와 하얀 벽만 보고 내려가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잉카의 태양신이 조명을 제대로 켜주셨습니다.
아마 태양신께서 보시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저 할매, 슬리퍼 신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비까지 오면 안 되겠다."
감사합니다, 태양신이시여. 추운 거 싫어하는 할매한테 딱 맞는 날씨였습니다. 그날만큼은 전기담요 생각도 안 났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그냥 멍청히 서 있었습니다.
말이 안 나왔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그렇게 울었던 사람이 정작 여기선 눈물도 안 나오더군요. 감격이 너무 크면 사람은 울지도 못하는가 봅니다.
가까이 가서 돌담을 봤습니다.
돌과 돌 사이에 틈이 없습니다. 시멘트도 없이, 모르타르도 없이,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돌을 깎고 맞추고 또 깎아서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쌓아 올렸습니다. 바퀴도 없던 시절에, 이 높은 산꼭대기까지, 그 돌을 날아와서요.
저는 버스 타고 올라와도 숨이 찬데 말입니다.
그 앞에서 슬리퍼 신은 제 발을 내려다보니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잉카 할아버지들, 저는 여기까지 앉아서 왔습니다. 대신 끝까지 잘 보고 가겠습니다.
3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죠. 우리가 '고대'라고 부르는 시대도, 거기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냥 오늘이었을 거라고.
마추픽추에 서니까 그 말이 정말 실감이 났습니다.
저 계단식 밭에서 누군가는 옥수수를 심고 감자를 캤겠지요. 저 좁은 돌길로 누군가는 물동이를 이고 오르내렸겠지요. 허리 아프다고 투덜대는 할매도 있었을 테고, 뛰어다니다 엄마한테 혼나는 꼬마도 있었을 겁니다. 월요일이면 월요일이었고, 배고프면 밥을 먹었겠지요.
그들에게 이곳은 유적이 아니라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느 날 이 도시를 두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이곳은 구름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정복자들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지요. 세상이 이곳을 다시 알게 된 게 겨우 100여 년 전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아서, 그래서 무너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 대목에서 저는 좀 웃음이 났습니다.
1화에서 그랬잖아요. 칠순이 되니 아무도 나를 안 쳐다본다고. 처음엔 서운했는데 지금은 시원하다고.
마추픽추도 그랬던 겁니다. 아무도 안 봐주는 동안, 조용히 제 모습을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 눈에서 사라진 시간이 오히려 이 도시를 지켜준 겁니다.
그렇다면 저의 '안 보이는 나이'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돌담 하나에 손을 대 봤습니다. 햇살을 받아 따뜻했습니다.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손바닥이 닿았던 그 자리에, 지구 반대편에서 시작해 70년을 떠돌던 한국 할매의 손바닥이 닿았습니다.
문명이 뭔지, 발전이 뭔지, 원시적이라는 건 누구의 기준인지. 그때 던졌던 질문들에 마추픽추가 대답해 주더군요.
바퀴 없이 이 도시를 지은 사람들 앞에서, 버스 타고 올라온 제가 누구를 원시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3화에서 저울은 놓고 오겠다고 했었죠.
네, 놓고 왔습니다. 마추픽추 돌담 앞에 슬쩍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운동화는 끝내 못 놓고 왔습니다.
(중편에서 계속됩니다. 그 운동화 이야기, 그리고 큰딸이 사준 슬리퍼 이야기.)
- 아쿠아 알리칸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