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가는 길 - 2화

이 배는 지구를 접어놓은 것 같다.

by류정uk

(9월 16일 항해 중 씀)


라면 먹고 울던 할매, 잠시 시간을 되감습니다. 약속대로 2화로 돌아왔어요.

이 글은 카리브해 한가운데서 부친 편지라, 편지처럼 늦게 도착했습니다.





마추픽추로 가는 전주곡 삼아 카리브 크루즈에 오른 지 며칠째, 새 취미가 생겼다.

사람 구경.

정확히는 사람들 접시 구경이다.


갈매기들이 배를 따라오는 동안, 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다닌다.

뷔페 줄에 서 있으면 선명한 패턴이 보인다.

버거, 칩스, 그리고 콜라.

케첩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팍팍 짠다.


디저트 코너로 넘어가면 케이크가 부대 단위로 서 있다.

초콜릿, 레드벨벳, 치즈케이크… 이름도 다 외우기 힘든 퍼레이드다.

모든 결심은 초콜릿 분수 앞에서 제일 먼저 녹아내린다.


어젯밤 자정,

‘카지노 성분은 혈액순환에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자가 진단을 내리며

그 분수 앞에 줄을 섰던 사람이 바로 나다.


패스트푸드 옆에는 늘 한산한 샐러드 코너가 있었다.

나는 그쪽 사람이다.

접시에 상추와 오이를 수북이 쌓아야 마음이 놓이는, 뼛속까지 한국인.

46년째 타국에 살아도 내 입맛은 여전히 김치찌개 국물까지 싹싹 비워야 직성이 풀린다.


며칠을 지켜보니 사람은 결국 자기가 익숙한 쪽으로 손을 뻗는다.

내 인생도 그랬을까.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늘 내가 제일 잘 아는 국물 쪽으로 손이 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긴, 무제한 뷔페 앞에서 사흘 만에 청바지 단추가 뻑뻑해진 사람이 이 주제로 누굴 가르칠 처지는 못 된다.


-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접시를 보면서도, 나는 그 접시 너머의 세상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접시는 어떻게 내 앞까지 왔을까.


누가 음식을 만들고,

누가 옮기고,

누가 씻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비하인드 씬(Behind the Scenes)’ 투어를 신청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평생 접시를 닦아온 내가, 남이 접시 닦는 걸 구경하려고 내 돈까지 낸 셈이다.


승객 스무 명 남짓이 승무원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끊기고, 뜨겁고 축축한 열기가 훅 끼쳐왔다.

화려한 무대였던 배가 계단 몇 칸 만에 무대 뒤 창고처럼 변했다.


주방.

세탁실.


필리핀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인도에서 온 젊은이들이

땀에 젖은 채 접시를 닦고, 수건을 개고, 시트를 다림질하고 있었다.

그 얼굴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겹쳐 보였다.


스물몇 살의 나.


80년대 초, 중동의 뜨거운 현장에서 남의 나라 말로 일을 배우고,

영국으로 건너와 남의 부엌에서 접시를 닦던 젊은 여자.

그때 나도 위층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래층에서 땀을 흘렸다.

그 시절 누군가 계단을 내려와 나를 들여다봤다면, 나는 고개를 들었을까.

아니면 더 숙였을까.


시트 모서리를 칼같이 접어 넘기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장에 몇 초도 걸리지 않는 숙련된 동작.

내가 어젯밤 구겨놓은 시트도, 수건 세 장도 모두 저 손을 거쳤을 것이다.



위층에 케첩을 짜는 손이 있다면,

아래층에는 그 접시를 닦는 손이 있었다.


세제와 땀이 섞인 냄새가 뒤따라 올라왔다.

위층에 다다르자 에어컨 바람이 아까보다 훨씬 차갑게 느껴졌다.

바람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이 배는 지구를 통째로 접어서 배 한 척에 욱여넣은 것 같다고.


한쪽은 접시를 채우고,

한쪽은 그 접시를 닦는다.


8,000명이 국경도 없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데,

정작 진짜 경계는 갑판과 갑판 사이, 딱 계단 하나 거리에 그어져 있었다.


일흔 살 한국 할머니가 지구의 축소 모형 한가운데서 케이크를 먹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참 우습고도 기특하다.


물론 오늘 저녁에도 케이크 코너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 케이크 옆에 누군가의 땀도 함께 얹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안 먹겠다는 건 아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케이크 한 조각의 무게를 알고 먹겠다는 뜻이다.


그저 접시를 비울 때마다 마음속으로나마

“고맙습니다.”

한마디를 제대로 건네자는 것.

딱 그 정도의 결심이다.


계단 아래 그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오래전 그 자리에 서 있던 나에게도.


아, 그리고 어제 ‘크루즈 기분 좀 내보자’며 수건을 세 장이나 쓰고 바닥에 팽개쳐둔 것도

이 자리를 빌려 슬그머니 사과드린다.


오늘부터는 최대한 말려 쓰고,

정 안 되면 양면으로 돌려 쓰겠습니다.


-

내일이면 리마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접힌 지구가 다시 펼쳐지면, 그제야 땅 위의 진짜 세상이 보일 것이다.




마추픽추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편지가 너무 밀려서 이제부터는 목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번 부칠 예정입니다.

청바지 단추는 점점 비명을 지르지만 글감은 자꾸 쌓이니,

일단 마추픽추까지는 부지런히 노를 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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