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안 가는가, 나는 왜 못 가는가

(북한 개성에서 케냐 몸바사까지, 놓지 못한 질문 하나)

by류정uk


지난 며칠간 카리브해 크루즈를 타고 가며 유리창 너머로 갈매기 몇 마리가 나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 갈매기를 바라보다가 자꾸 다른 새 한 마리가 떠올랐다.


지난주에 약속했던 그 새 이야기다.

사진 속 소녀를 기다리던 독수리.


나는 지난 30여 년을 활자를 피해 살았다.

아이 셋을 키우고 남의 나라에서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느라 바카라은 늘 나중이었다.


칠순을 맞아 일을 조금씩 줄이면서 그 나중이 늦게나마 찾아왔다.

올해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워지는 것이 꼭 반갑지만은 않다.

읽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는 것이 뒤늦게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루다T 작가님의 글 「기적」을 읽다가 남아공 사진기자 케빈 카터의 이야기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93년 수단에서 찍은 「독수리와 소녀」로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기자였다.

활자를 피해 살았더니, 세상에서 오래 회자된 한 장의 사진을 이제야 마주한 것이다.


사진 한 장이 이렇게 오래 사람을 따라다니는구나 싶었다.

국내에서는 이 사진에 ‘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부제가 붙어 알려졌지만,

정작 1993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캡션은 담담했다.


“굶주림에 지친 어린 소녀가 최근 아요드의 급식소로 가는 길에서 쓰러졌다.

근처에서는 독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담담해서 오히려 더 잔인했다.

사진은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 부제는 어쩌면 안아줄 손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일지도.


곧바로 카터를 찾아보았다.

그가 상을 받고 두 달여 뒤인 그해 7월 27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스스로 삶을 놓았다는 사실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찍었다는 것과 누군가를 구했다는 것 사이의 거리를, 그는 매일 견뎌야 했을 것이다.

증언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그를 살리지는 못했다.


나는 그 거리를 견딜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질문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왜 안 가는가.
나는 왜 못 가는가."


그리고 두 가지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2008년, 북한 개성의 거리였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수아비처럼 허우적거리던 청년들이 있었다.

걷는다기보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좀비의 거리였다.


같이 있던 영국인 가톨릭 친구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지?"


그때까지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렸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큼 확신이 들었다.


신이 있다면 침묵할 리 없다고.

그러니 신이 없거나, 우리가 이미 신을 대신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케냐 몸바사, 조지네 집 마당에서 마주친 눈빛도 있었다.

HIV 보균자로 태어난 아이가 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픔도 분노도 없는, 그저 담담하고 깊은 눈이었다.


그 눈은 동정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증언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몸바사의 눈빛」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썼다. 그때 그 눈빛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지금 나는 거꾸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다시 가지 않는가.”

이건 위로가 아니라 빚이다.


지금도 같은 장면이 세계 곳곳에서 반복된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수단, 미얀마.

뉴스는 이것을 숫자로 전한다.

사망자 몇 명, 난민 몇 만 명.


얼굴을 가진 사람이 숫자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마음을 놓는다.

슬퍼할 대상이 흐려질수록 슬퍼해야 할 의무도 함께 흐려지기 때문이다.


사진 속 아이도 한동안 이름이 없었다.


2011년 스페인 신문 <El Mundo>의 취재로 아이의 아버지가 증언하면서 세상은 알게 되었다.

아이는 소녀가 아니라 콩뇽(Kong Nyong)이라는 소년이었고,

유엔 급식소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2007년경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의 주인공이 18년 동안 이름, 성별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다.

얼굴을 숫자로 바꾸는 일에는 능숙한데,

숫자를 다시 얼굴로 되돌리는 일에는 왜 이리 서투를까.


왜 가지 않는가.

답은 간단하다.

이곳이 안전해서, 여유가 없어서, 내 삶도 이미 벅차서.

전부 사실이다.

그런데 전부 변명이기도 하다.

사실이라는 것과 충분한 이유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왜 못 가는가.

비자가 없어서, 자격이 없어서, 가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이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쥐어짜 낸 속임수 하나가 숨어 있다.

‘안 가는 것’을 ‘못 가는 것’으로 슬그머니 바꿔치기하려는 마음이다.


선택의 문제를 불가항력의 문제로 치환해 버리면,

마음 한구석의 죄바카라감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몸바사의 아이도, 개성의 청년들도, 사진 속 아이도 나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했을 뿐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는 늘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응답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은 시간이 흐르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무감각한 기억으로 조용히 다듬어져 갔다.


어쩌면 이 질문에 답이 없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답을 내리는 순간 질문 자체가 사라지기에, 우리는 스스로 답을 미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못 간다’고 결론을 내리면 마음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다음 비극 앞에서 더 이상 우리를 서성이게 하지 않는다.


십수 년 전 개성에서 던졌던 그 질문을 나는 아직 내려놓지 못했다.

신이 침묵하는 건지, 우리가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는 건지, 그 답도 여전히 얻지 못했다.


빚은 갚지 못했다.

다만 잊지는 않았다.

그것이 지금 내가 올릴 수 있는 가장 온전한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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