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가는 길 - 1화

나는 지금 카리브해 위에 있다

by류정uk


70세, 한국 할머니, 카리브해 - 이 세 단어를 나란히 놓고 보면 나도 웃음이 난다.


타국 생활 46년째. 영국에서만 41년을 살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기도 하다.

묘한 감정이다. 영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이 어정쩡 함이.


지금 나는 거의 8,000명이 오가는 거대한 배 위에 있다.

뷔페 구석, 오믈렛 코너 옆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갈매기 몇 마리만 유리창 너머에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따라온 건지도 모를 녀석들이다.

의리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 베이컨이 탐나는 건지.



사실 마추픽추는 오래된 꿈이다.

버킷리스트 1번.

언제부터 적어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해마다 한 번씩 생각했다.

‘올해는 가볼까?’

그러다 무릎이 아팠고, 비행기가 멀었고, 또 다른 핑계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그러다 올해는 생각을 바꿨다.

무릎이 완전히 항복하기 전에.

몸이 아직 내 말을 들어줄 때.

지금 안 가면 평생 못 간다.

그래서 떠났다.


영국에서 출발해 카리브해를 돌고, 리마를 거쳐 쿠스코로 가는 한 달짜리 여행을 짰다.

마추픽추 하나 보겠다고 꽤 멀리도 돌아간다.

이 크루즈는 그 긴 여정의 첫 페이지다.

시차도 달래고, 무릎도 달래고, 마음도 달래면서.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크루즈는 내가 해본 여행 중 가장 싼 여행이다.

11박 12일.

바하마와 카리브해를 도는 일정에 1인당 630달러 71센트.

하루로 나누면 약 57달러. 런던 시내 한 끼 점심 값이다.


혹시 속으로

‘이 할매 지금 뻥 까는 거 아이가?’

하시는 분이 있을까 봐 말해두는데, 영수증도 있다.


이 거대한 배 안에는 호텔이 있고, 식당이 있고, 헬스장이 있고, 극장도 있다.

한 번 짐을 풀면 끝이다.


그리고 먹는다.

아침, 점심, 저녁은 기본.

그 사이에도 뷔페가 열린다.

자정에는 디저트가 나온다.

이 배 위에서 배가 고프다면 그건 순전히 본인 잘못이다.


46년 타국 살이에서 터득한 것 중 하나.

좋은 여행은 반드시 비쌀 필요가 없다.

그리고 가끔은 살이 쪄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배에 올라와 보니, 이 배는 작은 세상 하나였다.

새벽 6시.

운동이나 좀 해볼까 하고 갑판으로 나갔다.

트랙을 한 바퀴 도는데 스물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직원이 나를 두 바퀴나 추월하고 지나갔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경멸도 아니고, 불쌍하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는 사람 취급.


나는 멈춰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아.

내가 이제 그런 나이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웃음이 났다.



젊었을 때 나는 눈치를 많이 봤다.

누가 나를 보나.

어떻게 보나.

헬스장에서도, 모임에서도, 어디서든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없다.

아무도 안 보니까.

처음엔 조금 서운했다.

지금은 솔직히 시원하다.


보이지 않으면 구경을 실컷 할 수 있다.

이 배에는 온갖 사람들이 있다.

자정 디저트 뷔페에서 초콜릿 분수 앞에 줄 선 40대들.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는 신혼부부.

맞춤 모자를 쓰고 투어 일정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중년 부부.

모두 자기들 이야기에 바쁘다.


생각해 보면 젊음이란 자기들끼리만 보는 닫힌 세계인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그 안에 있었다. 그 젊음 안에.

지금은 그 바깥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아무도 내 표정을 신경 쓰지 않는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오늘은 헬스장에도 가봤다.

배가 파도에 맞춰 기우는 헬스장이다.

가벼운 아령을 들고 서 있는데 거울에 내 모습이 보였다.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들었다.

아무도 안 봐도 들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거울 속 일흔 살 할머니와 눈을 맞추면서.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비로소 무대가 보이는구나.

보여지는 삶에서 보는 삶으로 넘어오는 것.

늙는 게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



갈매기들이 오늘도 따라온다.

나는 이 녀석들이 나를 응원한다고 결정했다.

70살이 되면 자기 관중쯤은 스스로 정해도 된다.


다음 화에서는 드디어 그 땅을 밟게 될 것이다

리마.

그리고 쿠스코.

고산병이 나를 먼저 알아볼지,

내가 마추픽추를 먼저 볼지,

그건 두고 봐야 안다.


갈매기들은 계속 나를 따라오는데, 나는 자꾸 다른 새 한 마리가 떠오른다. 그 새에 관한 이야기를, 이번에는 더 이상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건 이 여행기의 결과 조금 다른 이야기라, 마추픽추 시리즈 바깥에 따로 적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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