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영화 <하나 코리아>를 보고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창가에 앉아 잔잔한 음악을 듣는다. 세상은 평온하고 더없이 평화로운데, 문득 잔잔한 멜로디 끝자락에서 아득한 서늘함이 스쳐 지나간다.
'이 평화가 정말 내 것일까, 영원히 곁에 머물러 줄까.'
고요함이 깊어질수록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고요하게 떨려온다.
우리가 거저 얻은 듯 누리고 있는 이 평범한 하루 뒤편에는, 한 손에 저마다의 목숨을 서슬 푸르게 움켜쥔 채 이 땅에 다다른 이들이 있다. 탈북민 정착지원시설, 하나원의 문을 두드렸던 '혜선'의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이유다.
낯선 방 안, 거친 욕설과 폭력이 머리채를 잡아 흔들던 찰나. 숨이 턱 막히는 아픔 속에서도 혜선은 자신보다 더 떨고 있는 어린 룸메이트 후배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인다.
"언니만 떳떳하면 됐지. 일없습니다."
안전한 울타리에 들어섰음에도 지난날의 서슬 퍼런 그림자가 자꾸만 자신을 곁눈질하는 것 같다던 고백. 중국 대련의 차가운 거리에서 도망치며 가슴에 새겼던 건 어미의 처절한 한 마디였다. "독사처럼 살아라."
독해지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었던 야만의 시간. 그러나 독사가 되라던 어미의 말에 순응하면서도, 혜선은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한 촛불 같은 온기마저 꺼뜨리지는 않았다. 제 몸이 온통 멍들었을지언정, 옆 사람의 차가운 손을 먼저 어루만지는 사람. 그 따스함이야말로 그녀가 지켜낸 가장 고귀한 생존의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새로운 삶의 기로에서, 직업 훈련 대신 대학 문을 두드리겠다는 혜선에게 상담 직원은 조심스러운 걱정을 건넨다. 남한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그 길은 그저 까마득한 고생길일 뿐이라고.
그 온화하지만 아득한 벽 앞에서 혜선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생을 올려놓는다.
"힘든 건 상관없습니다. 해내면 됩니다. 나는 한 손에 내 목숨을 쥐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군가에게 대학은 스펙이고 가벼운 간판일지 모르지만, 혜선에게 배움은 존엄 그 자체다. 글을 배우고 자격을 갖추어 타인의 업신여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 그것은 목숨을 건네주고 바꾼 두 번째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당당한 인간으로서 바로 서기 위한 서글프고도 장엄한 선언이다.
하나원의 입소식 날, 원장은 그리움에 목이 메는 이들을 향해 나지막이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고향을 떠나오신 분들의 마음에는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지요. 오늘 이 자리에도 매일같이 고향을 떠올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슴속 구멍으로 스산한 바람이 통과할 때마다 혜선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현장 체험 학습에서 어머니에게 주지도 못할 화장품을 사들고 돌아온 날, 엉망으로 드럼을 치던 혜선은 원장에게 묻는다.
"화장품은 엄마한테 아무 쓸모가 없는데.... 원장님은 슬프지 않습니까? 여기 오는 사람들이 다 떠난다는 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여기 오신 모든 분들 모두 각자의 행복을 찾는 과정에서 잠시 머무르는 분들이니까요. 나야 뭐 그저 응원만 할 뿐이고."
드럼 스틱을 놓쳐 소리가 엉키는 날도 있고, 서툰 발걸음으로 규칙을 넘어설 때도 있다. 그러나 원장의 다정한 한 마디처럼, "다들 틀리면서 배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실패하고 부딪히며 조금씩 어설픈 서투름을 덜어내는 과정, 그 모든 소란함조차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소중한 이정표일 뿐이다.
하나원의 정든 문을 나서며 혜선은 나지막한 혼잣말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언젠가는 여기가 내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두고 온 고향은 먼발치 아지랑이 같고, 발을 딛고 선 남한 땅은 아직은 서늘한 타향. 가슴속 뚫린 구멍 사이로 슬픔이 숭숭 새어 나오지만, 혜선은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앞으로 걸어간다.
한 손에 저마다의 목숨을 쥐고 시린 바다를 건너온 모든 이들에게, 언젠가 이 땅이 품이 넓은 집이 되어주기를. 틀리고 무너지면서도 매일 조금씩 따뜻해질 그들의 내일에 따뜻한 응원의 바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