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들쥐>를 보고
오랜만에 집안에 조용한 침묵이 찾아온 밤이었다. 하루 종일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던 손주의 고단한 숨소리가 방 한구석에서 가만히 흘러나왔다.
손주를 돌보는 황혼 육아를 시작한 이후로, 내 삶에서 여러 편짜리 긴 드라마 시리즈를 본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에 가까웠다. 매일 육아 노동으로 쌓인 피로도 피로거니와, 혹여 화면 속 작은 소리가 아이의 깊은 잠을 깨울까 늘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평소 스릴러나 공포 장르는 멀리하는 편이었다. 어두운 조명 속의 섬뜩한 포스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작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들쥐>.
무슨 마음이었을까. 잊고 지내던 호기심이 불쑥 찾아온 그날 밤, 나는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잊고 살았던 '나'라는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강렬한 질문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드라마의 시작은 예사롭지 않았다. 주인공 은둔 소설가 제문재의 일상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갑자기 휴대폰이 먹통이 되고, 늘 쓰던 지문 인식이 거부당하며, 집조차 내 것이 아닌 상황. 세상 모든 시스템이 그를 '없는 사람' 혹은 '가짜'로 규정해 버린다.
"네가 진짜 너라는 걸 증명해 봐."
"신분증 보여 드려요?"
"그거 위조 가능. 차라리 옛날에 종이에 직접 적어놨던 시절이 좋았던 거다. 시간이 지나서 쌓인 먼지는 조작이 불가능하거든."
극 중 박순용 형사가 무심하게 던지는 이 대사를 들으며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오늘날 우리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지문, 심지어 안면 인식 기술로 스스로를 증명하며 산다. 하지만 디지털 데이터와 컴퓨터 기록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서, 누군가 마음만 먹고 나의 모든 정보를 복제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디지털 존재를 가짜가 송두리째 가져가 버린다면, 나는 진짜 내가 맞다고 어떻게 세상에 외칠 수 있을까?
드라마는 묻는다.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증명해?"
그리고 노자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남이 해 주는 거다. 나보다 남이 더 잘 아니까."
작품의 모티브는 우리가 잘 아는 전래동화 '손톱 먹은 쥐'다. 사람의 깎은 손톱을 먹고 자란 쥐가 사람으로 변해 진짜 주인을 쫓아내고 안방을 차지한다는 옛날이야기. 드라마 <들쥐>는 이 예스러운 지점이 현대적이고 치밀한 스릴러로 변주되는 지점이 참신했다.
주인공 문재는 자신을 쫓던 사채업자이자 전직 조폭인 흥신소 사장 '노자'와 기이한 동맹을 맺는다. 돈을 회수하러 왔다가 예기치 않게 문재의 '가짜 삶' 추적기에 말려든 노자는, 작중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설경구가 연기한 노자는 거친 인물이지만, 벼랑 끝에 몰린 문재를 향해 묵직한 한마디를 건넨다.
"진짜 노잣돈이다. 내 가진 거 다다. 문재야, 가짜가 되면 안 돼. 아무리 개 같은 인생이라도 진짜로 살아야 돼, 너."
남의 자리를 뺏고,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신분 세탁하여 살아가는 들쥐들의 세상. 질투와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들이 판을 치는 속에서, 노자가 던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진짜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내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 울렸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의 시선은 화면 너머의 내 삶으로 자꾸만 옮겨갔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 가족들은 나를 온전히 증명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내 모든 외형과 정보, 기억을 복제한 가짜가 나타난다면 내 친구와 가족들은 진짜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먹먹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결국 나를 나이게 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스펙이나 컴퓨터에 기록된 신분증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나와 관계를 맺고 나를 알아봐 준 '사람들'이다. 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나를 증명해 줄 수 없는 고립된 상황에 처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하게 섬처럼 갇혀버리는가.
육아로 바쁜 일상 속에서 우연히 만난 드라마 <들쥐>는 내게 단순한 스릴러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이름과 신분이라는 껍데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었다.
사람은 이름으로 사는가, 아니면 이름 없이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사는가?
오늘도 아이의 간식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누구의 할머니',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는 일상이지만, 깊은 밤 홀로 앉아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화려한 이력서도, 주머니 속의 주민등록증도 아니다. 오늘 하루 내가 타인에게 남긴 온기, 누군가의 기억 속에 쌓인 먼지처럼 조작할 수 없는 진심 어린 시간들이다.
"끝의 시작... 저는 그 뜻이 끝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면, 이 끝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일지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서 '진짜'로 살아가야 한다. 덤덤하게 내 곁을 지켜주는 가족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증명해 주는 소중한 관계들에 대해 다시금 깊은 감사함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