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고
최근 한 60대 지인이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지 고민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보았다. 주말마다 내려가 끼니를 챙기고 안부를 물었지만, 점점 기억이 옅어지고 몸이 작아지는 어머니를 일상의 바쁨 속에서 온전히 돌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했다. "엄마는 평생 우리를 위해 모든 걸 내어줬는데, 나는 엄마의 작아진 등조차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그녀의 고백에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깊은 침묵에 빠졌다.
'부모'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의 서사
우리는 흔히 부모를 나와 내 가족의 필요를 채워주는 '보호자'나 '희생자'라는 역할로만 기억하곤 한다. 부모 역시 처음부터 완전한 어른이 아니었고, 젊은 날의 꿈과 남모를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은 부모가 병들거나 내 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눈물로 깨닫게 된다.
신경숙 작가의 두 소설 <엄마를 부탁해>(2008년 10월 출간)와 <아버지에게 갔었어>(2021년 3월 출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두 바카라은 늘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부모라는 거대한 울타리가 사라지거나 쇠락해 갈 때 비로소 시작되는 자식들의 뒤늦은 고백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부모와 나누는 화해의 기록이다.
두 소설 모두 베스트셀러답게 탄탄한 구성과 흡인력 있는 서사로 단숨에 바카라장을 넘기게 만든다. 하지만 문장 마다 스며있는 엄마의 묵묵한 헌신과 아버지가 평생 짊어져 온 가장의 무거운 무게가 가슴을 울려, 몇 번이고 바카라장을 덮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에서 시작된 깊은 울림은 곧바로 <엄마를 부탁해>를 이어 읽게 했다.
소설 속 자식들이 마주하는 부모의 모습은 거창하지 않다. 그것은 늘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손에 쥐고 서 있던 당당한 보호자의 모습이 아니라, 부재를 통해서야 형태를 드러내는 기억의 조각들이거나 홀로 남겨진 집에서 조용히 쇠락해 가는 연약한 육신이다. 자식들은 그 뒤늦은 만남을 통해 부모라는 이름 아래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한 사람의 참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표지 ⓒ 창비관련사진보기
<엄마를 부탁해>는 서울역 한복판에서 일어난 엄마의 실종이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평생 가족의 중심이었던 엄마가 사라지자, 자식들과 남편은 비로소 '엄마'라는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한 여성의 삶을 추적한다. 소설은 2인칭 '너'라는 시선을 통해 자식들의 무심함과 이기심을 매섭게 추궁한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고독을 삼켜온 여인의 헌신은 실종이라는 갑작스러운 부재를 통해서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낸다. 자식들은 부모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로만 소비했을 뿐, 꿈과 아픔을 지닌 '개별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눈물로 반성한다. 늘 기댈 수 있는 산인 줄 알았던 엄마 역시 홀로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울어야 했던 한 명의 연약한 여성이었음을 자식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엄마로 살면서도 이렇게 내 꿈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소녀 시절을 나의 처녀 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바카라표지 ⓒ 창비관련사진보기
반면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늙고 병들어가는 아버지의 쇠락을 지켜보며 그 존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담는다. 전쟁과 가난의 격동을 견뎌낸 아버지는 대개 과묵하거나 엄격한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바라본 아버지는, 가부장이라는 껍질 뒤에 고독을 숨긴 '한 사람의 남성'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당신 몸보다 더 큰 짐을 지고 앞만 보고 걸어오신 분이었다. (...) 홀로 계신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바라볼 때, 나는 비로소 가부장이라는 그늘 뒤에 고독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의 남성을 마주했다.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소년 가장으로 가정을 건사해야 했던 아버지의 상처 앞에서 자식들은 비로소 깊은 연민에 도달한다. 세월의 무게에 꺾이고 병마에 약해진 아버지의 몸을 가만히 응시하며, 자식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있게 한 그 거대한 삶의 뿌리와 겸허하게 화해한다.
늙고 병든 아버지를 가만히 응시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 삶의 모든 근원이 바로 이 작아진 사내의 고단했던 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견뎌낸 그 모든 날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거대한 뿌리였다.
마침내 부모의 작아진 손을 단단히 쥐며
세월이 흘러 부모의 몸이 작아지고 기억이 옅어지면, 자연의 순리처럼 삶의 위치가 바뀐다. 평생 나의 거대한 울타리이자 보호자였던 부모가 이제는 나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 내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 낯선 역 앞에서 자식들은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내가 과연 그분들이 나에게 내어주었던 그 깊고 무거운 품을 다시 내어줄 수 있을까. 부모의 삶을 온전히 바카라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이 어깨를 눌러올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가는 부모를 수발 하고 돌보는 일은 때로 고단하고, 희미해져 가는 그들의 기억을 지켜보는 일은 서글프다.
그러나 두 소설이 전하는 위로는 명확하다. 부모 역시 처음부터 완전한 어른이나 거대한 보호자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이제 어째야 하나" 왈칵 두려워하던 연약한 인간이었고, 숱한 나쁜 패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켜냈을 뿐이다. 우리가 부모의 그 두려웠던 순간들과 고단했던 생의 여정을 이해할 때, 돌봄은 비로소 짐이 아닌 깊은 사랑의 실천이 된다.
결국 두 소설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시선이다. 부모를 '보호자'나 '헌신'이라는 역할의 틀에 가두어 두는 한, 우리는 그분들이 품었던 진정한 고독과 상처에 도달할 수 없다. 부모 역시 나처럼 두려워하고, 때로는 눈물 흘리며, 애써 삶의 신산함을 건너온 '독립된 한 개별 인간'이었음을 비로소 헤아릴 때 진정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화해가 시작된다.
부모의 손이 아직 따뜻할 때, 그분들이 한 인간으로서 견뎌온 일생을 연민과 존경으로 온전히 응시하는 것. "당신이 살아낸 모든 날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작아진 손을 단단히 쥐여주는 것. 부모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깊이 이해하고 응시하는 그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삶의 바통을 이어받아 우리가 부모의 삶 앞에 비로소 바로 서는 가장 아름다운 첫걸음이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