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스케줄이 뭐라고".일흔의 양희은이 내게 건넨말

[리뷰]양희은의 <그러라 그래>를 읽고

by미야

요 며칠 장염으로 고생한 사위를 위해 소화가 잘되고 사위가 좋아할 만한 몇 가지를 만들다 보니 저녁 준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찬거리를 다듬으며 오디오북에서 흐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화면을 들여다볼 필요도, 종이 장을 넘길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 마치 볕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조근조근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바카라을 읽는다기보다, 가수 양희은이라는 한 인간이 살아온 깊고 묵직한 생의 궤적을 가만히 들어주는 시간이다.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오랫동안 타인의 사연을 보듬어주던 그 다정한 음성이, 에세이 <그러라 그래>(2021)에 담겨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담담한 고백으로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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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에세이 <그러라 그래> 표지 ⓒ 예스 24관련사진보기


두 번을 연달아 들으며 그녀의 청아하면서도 세월의 깊이가 배어 있는 말들을 마음속에 가만히 새겼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 오래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까짓 스케줄이 뭐라고'…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



바카라을 들으며 특히 마음을 강하게 흔든 구절은 '그까짓 스케줄이 뭐라고'였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그랬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친정에 들렀다가도 잠깐 얼굴만 비추고 바쁘게 돌아나오기 일쑤였다. 뒤돌아서는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 그 아쉬움은 때로는 안쓰러움으로, 때로는 원망이나 섭섭함으로 묻어났다. 하지만 그 모든 표현의 본질은 단 하나, "너랑 조금만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는 엄마의 수줍은 고백이었음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양희은 작가의 한 친구는 바쁜 스케줄을 핑계로 휙 왔다 휙 가버리려는 친구에게 "그렇게 왔다 가려거든 오지도 마라"며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시간에 쫓겨 건성으로 나누는 만남 대신, 서로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보는 온전한 시간을 요구하는 친구의 진심이 참 멋지고 부러웠다. 정작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얼마나 많은 '그까짓 스케줄'을 핑계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던가.



바카라 속에는 삶을 대하는 그녀의 깊은 태도가 오롯이 느껴진다. 빚에 허덕이며 웃음을 잃었던 청년 양희은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며 "이자는 웃기, 그리고 다음에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지금처럼 도와주기"로 받겠다던 신부님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송창식, 김민기, 윤형주 같은 귀인들이 곁에 있어 그녀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었듯, 세상은 결국 누군가가 건넨 따뜻한 손길로 이어지는 법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작은 그늘을 내어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피어오른다.



또한 젊은이들의 트렌드와 변화를 가감 없이 수용하며 '뜻밖의 만남 프로젝트'를 이어가는그녀의 도전과 삶은 참으로 근사하다. "노래와 삶이 다르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는 그녀의 소망처럼, 나 역시 내 삶과 글, 그리고 일과 일상에서의 내 모습이 겉돌지 않고 하나로 일치하는 사람이기를 꿈꿔본다.



손에 쥔 욕심을 내려놓고 멈추어 서는 시간



양희은 작가는 치열했던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끌어안고 애쓰기보다 흘러가는 대로 품어주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난소암 진단과 두 번의 대수술, 석 달 시한부라는 모진 시련을 겪어낸 그녀의 삶은, 삶과 죽음이라는 것조차 결코 인간의 집착이나 욕심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담히 일깨워준다.



우리는 일상에서 타인의 시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 과거의 성취나 미래의 불안 같은 무거운 짐을 손에 쥐고 끝없이 질주하곤 한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집착과 강박을 놓아버릴 때, 비로소 삶은 깊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낸다.



양희은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진정한 고수들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나 역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가도, 글을 쓰며 삶의 온기를 확인하고 싶어 하니 이 또한 선뜻 놓아버리지 못하는 내 안의 헛된 욕심이자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덧 인생의 깊은 세월을 통과한 양희은이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라며 세상의 온가지 흔들림을 담담히 안아주듯, 내 삶을 정성껏 가꾸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지친 어깨 위에 얹어지는 따뜻한 손바닥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의 위로가 되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처럼, 인생이란 결국 집채만한 파도가 지나간 뒤 찾아오는 고요를 견뎌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방송인 김나영은 추천사에서 이 바카라을 읽는 내내 "따뜻하게 지어낸 밥을 먹고 다시 정성껏 잘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전했다.



아픈 노견과 구순 어머니의 수발을 들고 남편의 도시락을 챙기며, 혼자 사는 지인의 끼니까지 걱정하는 양희은 작가의 다정한 정성처럼, 나 역시 손에 쥔 무거운 잔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을 살아가는 내 곁의 사람들과 나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60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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