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대신 "감사하라"는 시를 읽다

[리뷰] 정일근 <혀꽃의 사랑법>

by미야

창밖에 비가 지근거리며 내리는 날이면 마음 밑바닥에서 나직한 시심(詩心)이 피어오른다. 세월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진 요즘, 시를 읽는 것이 나의 가장 평온한 일상이 되었다. 어린 손주들의 그림바카라을 빌려오며 엄마가 읽을 시집 두어 권을 함께 챙겨 오는 딸아이 덕분이다.



그 다정한 마음 덕에 오늘도 정일근 시인의 시집 <혀꽃의 사랑법>(2023년 7월 출간)을 읽는다. 시집을 넘기다 보면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는 구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굳은살이 솟아올라 피어난 시인의 손가락 혹을 다룬 '시인의 꽃', 세상의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기가 담긴 '독활', 한겨울 몽돌 해변에서 이 악물고 피어나는 '동백에 대한 편견', 그리고 백 살 넘은 음나무를 찾아가 물음을 던지던 '머꼬?'까지.



시인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약을 찾아내는 구도자의 자세로 세상을 품어 안고 있었다. 세월의 깊이가 만든 그 그늘에서 나 역시 한참을 머물며 지나온 내 인생의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은 것은 '왕년에, 왕년에'라는 시였다. 시인은 한국현대문학사를 지나오며 한때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대신, 절판된 시집과 몇 줄 약력만을 남긴 채 저물어가는 날들을 덤덤하게 수용한다. "왕년에,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왕년에,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거냐?"라며 자신을 향해 던지는 칼날 같은 질바카라, 그리고 이내 "감사하라, 그래도 가끔 시 청탁이 오는 일을"이라며 미소 짓는 겸손함이 깊은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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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표지 ⓒ 몰개관련사진보기


그 구절을 읽다 보니, 오랜 세월 분필로 수식을 쓰며 지켜온 나의 교단 세월이 겹쳐 보였다. 어렵고 싫다던 그놈의 수학을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이해시켜 보려고 이리 달래고 저리 꼬시며 머리를 싸매던 나날들. 밤새 연구한 나만의 필살기 수업안을 동료 교사들에게 신나게 풀어놓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요즘은 인공지능이 수업을 보조하고, 교실의 풍경마저 기술 중심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다. 우리가 쏟았던 그 모든 뜨거움도 어쩌면 유물 같은 옛날 노래일지 모른다. 빈 교실의 바카라상 위로 비스듬히 노을이 넘어가는 시간처럼, 나 역시 이제는 칠판 앞을 떠나온 퇴직 교사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이 "그래도 가끔 시 청탁이 오는 일"에 감사하듯, 나 역시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감사의 이유를 찾아낸다. 내가 남겨둔 자그만 온기를 길잡이 삼아 제 꿈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을 어느 옛 제자의 뒷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지나온 시간은 충분히 숭고해진다. 비록 칠판 앞의 내 자리는 사라졌을지언정, 누군가의 삶 깊은 곳에 작은 온기로 남아 있다면 그 자체로 교사로서의 삶은 완결된 것이리라.



정일근 시인은 <혀꽃의 사랑법>에서 꽃이라 믿었던 화려함 뒤에 숨은, 열매를 맺기 위한 뜨겁고 단단한 씨앗을 노래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꽃잎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끝에 남는 진실한 마음만이 다음 세상까지 인연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교직이라는 긴 계절을 보내고 이제는 손주들의 웃음소리와 서재의 향기 사이를 오가는 일상. 바쁜 일상에서도 틈틈이 펜을 잡고 내 안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며, 딸아이가 건넨 시집 속에서 삶의 깊이를 재발견하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새로이 피워내는 '혀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공적이나 직함은 희미해질지라도, 내 손끝에서 빚어지는 나지막한 문장들과 가족을 향한 다정한 온기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씨앗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창밖에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리지만, 시집 한 권이 마음을 훈훈하게 채워준다. 지나온 '왕년'을 어루만지고 오늘을 감사히 맞이하는 이 소박한 일상이 비 오는 날의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선물이 되어주고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6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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