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와 미용실 사이, 7월의 도서관 피서

[리뷰] 대구 구수산도서관에서 만난 고선경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by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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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테마 도서인 "여행하는 문장들" 코너에 바카라들


치과 진료를 마치고 나오니 7월 대프리카의 열기가 훅 끼쳐왔다. 미용실 예약 시간까지는 두 시간 남짓의 애매한 여유가 생겼다. 무더위를 피해 들어간 대구 구수산도서관은 시원했다. 2층 문학실 "여행하는 문장들" 테마 코너를 둘러보다 소다수 빛깔을 품은 시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2022년 신춘문예로 등단해 문단의 기대를 모은 고선경 시인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2023)였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바카라으로의 여행은 무더운 여름날의 완벽하고 사치스러운 피서가 되었다.



"이거 딱 내 이야기잖아"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건강에 좋은 시〉였다. 시 속에 나오는 화자의 엄마는 늘 무언가의 효능에 골몰한다. 블루베리 효능, 토마토 효능, 치자 효능을 검색하는 엄마를 보며 시인은 말한다. "나는 다정의 효능이나 / 시의 효능에 대해 골몰한다"고. 하지만 이내 "내 시에 비타민이나 / 식이섬유가 함유되어 있지는 않아"라 하더니, 마지막에 가서 슬그머니 진실을 폭로한다. 엄마가 블루베리를 먹는 진짜 이유는 눈에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블루베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이거 딱 내 이야기잖아!" 했다. 그렇다. 우리는 매 순간 대단히 합리적이고 거창한 명분을 찾아 그것을 그럴싸하게 읊어대지만, 결국 진실은 아주 단순하다. '그냥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시인은 다정과 시의 효능에 골몰한다는데, 명분에 연연하는 나는 아직 시인이 되려면 멀었구나 싶었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지〉의 "매일이 소진의 나날"이라는 고백은 동시대 청춘들의 쓸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그런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대체 어디에 어떻게 소진해야 할지 몰라 참 많이도 난감해하고 서성였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의 모퉁이를 돌아 퇴직을 맞이한 지금의 나는 어떤가. 이제는 소진할 기력조차 아껴가며 하루 분량의 삶을 조금씩 비축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흘러넘치던 청춘의 열정과 아껴두어야 하는 노년의 비축이 시의 행간 사이에서 멋쩍게 교차했다.



생각을 배경음악처럼 깔고, 화분 속에 생각을 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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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도서 열람 공간 꿈키움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고선경 시인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2023)를 읽다


시인의 문장은 유쾌하고 능청스럽다. 〈멜론 소다와 나폴리탄〉에서 시인은"음악이 배경이 될 수 있다면 / 생각도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묻는다. 음악처럼 은은하게 삶의 배경으로 깔아두는 생각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복잡하고 머리 아픈 계산이나 고뇌 대신, 그저 불어 터진 스파게티처럼 가볍게 끊어져 버리는 느긋하고 유쾌한 생각들을 배경음악처럼 깔아두고 살고 싶다.



심지어 〈멜론 껍질에 남은 향기와 과육을 갉아 먹는 벌레들〉에서는 "아내와 내가 기르는 화분 속에는 식물이 없고 생각이 있다"고 고백한다. 흙을 채우고 물을 주며 파릇파릇한 이파리 대신 '보이지 않는 생각의 싹'을 키워내는 부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화분들이야말로 각자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온갖 상상과 성찰의 모판일지도 모른다.



"번번이 져주는 것", 그것이 진짜 친구의 해독법



시인이 말하는 우정과 관계의 미학은 뭉클한 다정함을 품고 있다. 대학 시절 문예창작과에서 만나 서로의 예술적 뿔을 지켜주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정과 세리〉는 참 아름다웠다. "뿔이 닳아 버렸다. 서로를 해독하느라"는 구절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야 했던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인은 제안한다. 이제 늙어버린 우리는 더 이상 해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우스운 소문'이 되자고.



"문예창작과는 더 슬픈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야 게임을 더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계속 지고도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 수정과 세리는 다 알고도 번번이 져 주었다 번번이 내가 이기고 싶어 해서"라는 고백처럼, 상대방이 이기고 싶어 하는 눈치임을 뻔히 다 알면서도 기꺼이, 번번이 져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친구임을 시인은 나직이 일깨워준다. 삶이라는 시합에서 기꺼이 패자가 되어 상대를 빛내주는 다정함, 그 무구한 항복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버텨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버팀목이 아닐까.



일상이라는 완벽한 예술, 그리고 유쾌한 무장해제



〈여름 감기〉에서 시인은 말한다. 누군가 "제일 잘하는 게 뭐야?"하고 물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상"이라고 대답하는 상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매일 지겹게 반복되는 하루를 묵묵히, 그리고 다정하게 살아내는 일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닌가. 만약 누군가 그 일상을 세상에서 가장 잘 해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삶의 완벽한 달인일 것이다.



시인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경계가 없다. 〈우주 달팽이 정거장〉에서는 "벽에다 씨앗을 심어 볼까 / 궁금증이 자라는 모양을 보고 싶어"라고 말한다. 딱딱하고 메마른 벽에 씨앗을 심어 질문이 싹트는 과정을 관찰하겠다는 이 기상천외한 발상은 오직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남들은 "살 걱정 죽을 걱정"을 하라며 삶을 옥죄어 오지만, 시인은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이라며 "별 걱정을/ 다"하고 일축해 버린다.



그렇다.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 소풍을 왔으면 어떻게 더 즐겁게 놀 것인지를 고민해야지, 왜 일어나지도 않은 생사의 걱정에 메여 매 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그건 애초에 내 소관이 아닌 것을, 시인은 이미 온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유머 코드가 없는 사람이라도 시인의 유머 앞에서는 무장해제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눈에 띄기 위해서라면 "교수님이 무서워서 돌연사! / 애인이 생기지 않아서 돌연사! / 인생이 심심해서 돌연사!"를 하겠다는 〈살아남아라! 개복치〉의 절규는 웃기면서도 서글픈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야경의 범위와 OTT의 역설..."너도 못 가니 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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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경 시인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2023) 표지


이 시집은 끊임없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상식을 급습한다. 〈우리는 목이 마르고 자주 등에 젖지〉에 등장하는 "야경이라는 건 / 어둠이 밀려날 수 있는 데까지를 말하는 걸까?"라는 구절 앞에서 나는 읽기를 멈추었다. 야경의 진짜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반짝이는 불빛이 닿는 곳까지 일까, 아니면 그 불빛을 둘러싼 깜깜한 어둠 전체를 포함하는 걸까?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질문의 심연으로 나를 밀어 넣는 시인의 물음은 매섭고도 짜릿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문명에 대한 위트로도 이어진다. "다시 보고 싶었던 드라마들은 이제 여러 OTT 플랫폼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어서 / 다시 보고 싶지 않아졌다"는 구절을 읽을 때는 격한 공감에 무릎을 쳤다.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자 오히려 제 가치를 잃어버리는 소유의 역설을 어쩜 이리도 정확하게 포착해 냈을까. 쉽게 닿을 수 있어 오히려 아련함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건네는 위로는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헤치게 만든다. "죽기 전에 못 가보면 어쩌지? / 괜찮아 너만 못 가는 거 아니야"라는 구절은 참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나 혼자만 낙오될 때는 억울하고 외롭지만, 너도 못 가고 나도 못 간다는 동병상련의 연대를 확인하는 순간 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함께 손잡고 갈 다정한 친구가 있다면 그곳 역시 견딜 만한 놀이터가 되지 않겠는가.



몸도 마음도 완벽히 쉬어간 하루



고선경 시인이 보여준 향기로운 것들에 취해 있다보니 어느새 예약 시간이 다 되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이 피서가 아니다. 시원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마음에 드는 시 구절을 필사하는 시간. 몸과 마음을 온전히 쉬어갈 수 있게 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품격 있는 피서가 아닐까. 유난히 뜨거울 올여름, 도서관 피서를 아주 자주 애용하게 될 것 같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51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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