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한 차례 휩쓸고 가더니, 숨이 턱 막히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시작된 일요일 오후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등줄기에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후텁지근한 공기 탓에 몸도 마음도 눅눅해져 있었다.
마침 도서관에 간다며 가방을 챙기는 딸아이의 등 뒤에 대고 "머리 식히며 마음 편히 읽을 만한 시집이나 한 권 빌려다 달라"고 넌지시 부탁을 건넸다. 창밖의 매미 소리 만큼 일상이 지루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얼마 후 집에 돌아온 딸아이가 내민 바카라은 시집이 아니었다. 다사카 히로시가 쓰고 김윤희가 옮긴 <애벌레가 세상의 끝은 아니다>(2025년 12월 출간)라는 제목의 얇은 바카라이었다. 연한 나비 빛깔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표지가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표지 위에는 작은 나비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폴폴 날아가고 있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어미 나비 한 마리가 고요히 엎드려 있었다. 마치 고단하고 지난한 삶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눈부신 날개를 펴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 자리에서 바카라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려갔다. 시처럼 짧고 간결한 글귀들 속에서 심장을 쿵! 하고 울리는 거대한 떨림과, 가슴속 깊은 곳까지 가만히 스며드는 길고 깊은 여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흔들리는 삶을 붙잡아주는 문장들
▲바카라표지 ⓒ 글로벌브릿지관련사진보기
이 바카라은 거창한 논리로 독자를 설득하려 하거나, 차가운 칼날 같은 훈계로 삶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세상이라는 치열하고 고독한 전쟁터를 묵묵히 걸어온 이들의 신념, 그리고 매 순간 삶을 바라보았던 다부진 각오들을 조용하고 담담하게 들려줄 뿐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찌나 깊고 은은한지, 마치 입안에 부드러운 사탕 한 알을 넣고 오래도록 공을 굴리며 그 맛을 음미하고 싶은 눈부신 아포리즘들이 가득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는 일에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그것이 일의 진정한 가치를 가름하는 척도입니다."
- 본문 '두 명의 석공' 중에서
눈앞의 돌덩이를 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악전고투하는 와중에도, 내가 지금 '갈 곳 없는 심령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로서의 교회'를 짓고 있음을 명확히 아는 석공의 지혜가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거친 무게도 결국 내가 그 일에 어떤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깨달음이 마음에 깊이 가닿았다. 의미를 아는 자는 결코 삶에 쉽게 떠밀려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바카라 속에는 발목 힘을 기르기 위해 무거운 납덩이 운동화를 신고 매일의 지루한 삶을 버텨낸 축구선수 스탠리 매슈스의 이야기부터, 닥쳐온 위기를 나 자신의 숨은 가능성을 이끌어낼 최고의 기회로 삼은 야구선수 이치로의 긍정, 그리고 무려 9000번이 넘는 실패 속에서도 '실패하는 방법 수천 가지를 새로이 알아냈다'며 호기롭게 웃었던 천재 과학자 에디슨의 지독한 노력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 치열한 문장들을 가만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문득 내가 걸어온 지난날들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무너지는 자신을 위로하려 나직이 기도하며 험난한 진흙탕을 묵묵히 헤쳐왔던 시간들.
그 악전고투의 나날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준 '납덩이 운동화'였음을 깨닫는 순간, 울컥하며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차올랐다. 인생의 제약 속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자기표현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지금, 이 순간을 누리십시오"
특히 평생을 죽음에 대해 연구했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정작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남겼다는 "저는 지금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에필로그에 담긴 마지막 지혜의 목소리는 한동안 바카라장을 덮지 못하고 멈춰 서게 만들었다.
"과거는 없으며 미래도 없으리.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영원히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 뿐입니다. 지금을 살아가십시오. 이 순간을 누리십시오."
- 본문 '에필로그' 중에서
우리는 늘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 하며 미리 사서 걱정하거나,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을 뒤돌아보며 후회하느라 바쁘다. 그러는 사이 정작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눈부신 '지금'이라는 선물을 통째로 놓치며 살아간다.
정원 한 모퉁이의 이름 없는 돌처럼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정화해 주는 일, 대화를 나눌 때 내 주장만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의 말에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진짜 대화를 나누는 일, 심지어 살면서 마주하는 억울한 일과 불행한 만남조차도 내 삶을 구성하는 소중한 한 조각으로 유연하게 품어 안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좁디좁은 애벌레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하늘로 청명하게 날아오르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지친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바카라을 완전히 덮고 나니 후텁지근하게만 느껴지던 일요일 오후의 눅눅한 바람이 사뭇 다르게 피부에 와닿았다. 내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조용한 야심과 강력한 에고이즘을 가만히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자리가 찾아오는 듯했다.
"사는 게 너무 고달프고 벅차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것에 지쳐서 잠시 쉬어가고 싶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이 바카라을 권하고 싶다. 속도에 밀려 정신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가 정말 원하는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지,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진짜 그림'이 맞는지 스스로 묻고 싶은 이들에게 다정하고도 튼튼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단 한 권의 바카라 덕분에 지루하던 여름날의 중심에 작은 나비 한 마리를 들여놓은 기분이다. 장마가 지나간 자리, 무더위가 맹렬히 기세를 떨치는 오후이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저 푸르른 하늘을 원 없이 올려다보며 자유롭고 기분 좋은 비행을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