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석에 앉은 옆지기가 깜빡이도 없이 밀고 들어와 깜짝 놀라게 한 차량을 향해 점잖게 한 소리를 던진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바라본다.
"여보, 내가 딱 저래요. 깜빡 잊었거나 마음이 다급해서 저러겠지. 그냥 당신 아내려니 생각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줘요."
나의 고백에 남편은 이내 허허 웃으며 나무라던 말을 거둔다. 세상에는 유독 손에 익지 않고 도망치고 싶은 분야가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내게는 그것이 바로 '운전'이었다.
"운전은 정말 나랑 맞지 않는구나."
생각이 여기에 굳어지니 운전대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었다. 온라인 게임에 다닐 때는 출퇴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를 몰았지만, 출장이 없는 날이면 대중교통 카드를 먼저 챙겼다. 하지만 이 부담감은 뜻밖의 긍정적인 변화를 데려오기도 했다. 운전을 기피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웬만한 거리는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 다녔고,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조용히 사색에 잠기거나 가방 속 바카라을 꺼내 읽으며 나만의 밀도 높은 시간을 즐겼다.
그런데 평생 갈 것 같던 이 '운전 울렁증'이 퇴직을 하고 나서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여전히 운전이라는 행위 자체가 완전히 편안해진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퇴직 후에는 예전 같은 크고 작은 사고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최근 들은 오디오북 <30분 손자병법 : Driving Edition>의 문장들을 곱씹다가 비로소 그 수수께끼 같은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이 바카라은 고대 전장의 전략을 도로 위 운전자의 마음가짐에 비추어 설명하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 하나하나가 지난날 나의 실패와 지금의 평온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내 마음의 전장에서 이미 결정되었던 승패
▲나를 정말 괴롭혔던 건 조급함이었다. ⓒ michielannaert on Unsplash관련사진보기
"전쟁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승자는 싸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이겼고 패자는 싸움을 시작하기 전 이미 졌다. 리더의 진짜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조급한 바로 자기 자신이다." <손자병법> 제1편 '장(將)' 중에서
온라인 게임에 다닐 때의 나는 도로에 나서기 전, 이미 마음의 전장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늘 바빴고 "조금만 더, 이것까지만 해놓고"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붙들고 있다가 시간이 임박해서야 허둥지둥 길을 나섰다. 지각하지 않으려니 마음은 조급했고 시간은 늘 모자랐다. 바카라의 표현대로 마음이 조급하니 도로는 나를 가로막는 '적'이 되었고, 핸들은 거칠어졌다. 나를 괴롭혔던 건 운전 실력의 부재가 아니라,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조급함이라는 이름의 적이었다.
반면 퇴직은 내 삶에 '시간의 여유'라는 가장 큰 전략적 무기를 주었다. 지금 당장 그 일을 끝내지 않아도 돌아와서 하면 되니, 약속이 있으면 미리 출발해 목적지 근처에서 차 한 잔을 마실 여유를 두고 출발한다. 시동을 걸기 전 그 몇 초의 순간, 이미 내 마음의 날씨가 '맑음'으로 정돈되어 있으니 도로는 더 이상 적이 아닌 평온한 '동료'로 다가왔다.
"현실을 잃은 자는 100만을 품고도 이길 수 없다. 하늘의 흐름을 읽는 자는 싸우지 않아도 이긴다." <손자병법> 제3편 '천(天)' 중에서
온라인 게임인 시절의 나는 '출근 시간'이라는 현실에만 매몰되어 도로의 흐름이나 날씨 같은 주변 상황(天)과 지형(地)을 전혀 읽지 못했다. 비가 오든 차가 막히든 그저 내 조급한 감정이 핸들을 잡게 두었다.
그러나 퇴직 후의 나는 흐름을 타되 중심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앞 차가 조금 굼뜨게 가도 가만히 기다려줄 수 있는 넉넉함이 생겼다. 무리하게 끼어드는 순간보다 흐름을 읽고 기다리는 선택이 훨씬 현명하다는 손무의 가르침을, 나는 퇴직 후의 도로 위에서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부족함으로 배우는 도로 위의 '부전지승'
사실 남편이 허허 웃으며 나무라던 말을 거두게 만든 나의 고백 속에는, 오랜 운전 잔혹사 동안 굳게 지켜온 나만의 원칙이 숨어 있다. 나는 운전 실력은 형편없지만, 도로 위에서 한 가지 굳게 지켜온 원칙이 있다. 앞차가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끼어들거나 엉망으로 주행을 해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적을 울려본 적이 없다. 다른 차의 운전자를 나무라거나 흉 보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내가 워낙 운전을 못 하고 헤매다 보니, 도로 위에서 거칠게 흔들리는 다른 차들을 보아도 '저 사람도 오죽하면 저럴까, 나처럼 운전이 서툴고 마음이 다급해서 저러겠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함이 뜻밖에도 타인을 향한 가장 깊은 이해의 열쇠가 되어준 셈이다.
<손자병법> 제2편에서는 이를 '도(道), 함께 가는 길의 힘'이라 부르며, "도란 백성과 군주의 뜻이 하나 되는 것이고, 리더십의 첫 단계는 공감"이라고 했다. 도로 위에서 양보는 손해가 아니라 흐름의 재조정이라는 바카라의 문장처럼, 다른 이의 미숙함을 내 미숙함으로 품어 안는 공감의 마음이야말로 도로 전체를 안전하게 만드는 진짜 리듬이 아닐까.
"강함은 보이지 않게 숨기고 약함은 부드럽게 활용하라. 여백은 결핍이 아니라 움직임을 위한 공간이다." <손자병법> 제8편 '허실(虛實)' 중에서
실력은 속도가 아니라 거리 감각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차창 앞에 한 뼘의 여백을 두니 돌발 상황이 와도 부드럽게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의 공간이 빽빽하게 차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도로 위의 안전 지대가, 마음에 여백을 선언하고 나니 비로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를 향해 경적을 울리는 대신 조용히 속도를 줄이는 내 오랜 습관은, 손무가 말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부전지승(不戰而勝)'의 지혜와 다름없었다.
내 삶의 핸들을 돌아보다
"승부의 품격은 마무리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 <손자병법> 제10편 '승리 후의 품격' 중에서
오늘도 나는 목적지에 도착해 반듯하게 주차를 하고 잠시 운전대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고른다. 시동을 끄는 순간, 오늘 나의 주행이 얼마나 평온했는지, 타인을 얼마나 배려했는지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지나온 38여 년의 온라인 게임 생활이라는 거대한 전장을 무사히 완주하고, 이제 막 퇴직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 내 삶의 여정도 이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칠고 조급했던 전반전의 운전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내 안의 두려움과 초조함을 이겨내고 나만의 속도를 찾은 기분이다.
운전은 단순히 차를 움직이는 손끝의 기술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 근육을 다스리는 마음의 공부였다. 세상을 이기려면 먼저 나를 이겨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마지막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비로소 찾아온 삶의 여유라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나는 내일도 서두르지 않고 평온하게 삶의 핸들을 잡을 것이다. 오늘의 양보와 공감이 내일의 평화로운 전진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