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표지 위로 아빠의 손을 잡은 아이가 환한 불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한나절 동안 바라보았다. 선뜻 바카라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자와는 카지노 글쓰기 플랫폼 온라인카지노스토리에서 만나 출간 소식을 미리 들었던 터였다. 그녀가 아빠 '광호씨'를 향해 품은 마음이 어떤 무게인지 짐작이 되었기에, 그 내밀한 기록 속으로 마구 걸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손주들을 돌보는 일상에서 잠시 짬이 난 아침, 마침내 <나의 아빠 광호에게>(2026년 5월 출간)를 펼쳤다. 글은 담백하게 술술 읽혔는데, 그 담백함 속에 뭉클함이 주렁주렁 달려 나왔다. "흐려지는 아빠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록 뿐이었다"라는 프롤로그의 고백을 이정표 삼아, 나 역시 이미 고인이 되신 나의 아버지를 만나러 긴 여행을 떠났다.
엄한 '아부지'가 품었던, 서툴고 따뜻했던 속마음
우리 세대에게 '아빠'는 참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다. 우리는 그들을 대개 '아버지'라 불렀다. 내게 아버지는 언제나 무겁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공기부터 엄숙하고 불편했다. 아버지가 집을 비워야만 우리 5형제는 비로소 숨을 크게 쉴 수 있었고, 제각각 제 모양대로 피어날 수 있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벼락 같은 고함과 야단이 날아왔기에 형제들은 아버지 근처에 얼씬도 하려 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막내딸인 나만은 유일하게 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엄한 모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 마주 앉은 밥상에서 아버지는 당신 상에만 오르던 귀한 계란찜을 한 숟가락 쓰윽 떠서 내 밥숟가락 위에 무심한 듯 얹어주곤 하셨다. 어디 나가서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집을 못 찾아오실 때도, 주머니 속에는 알사탕을 꼭 챙겨와 내 손에 슬그머니 쥐여주던 분이셨다.
술을 드시지 않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점잖은 양반이었는데, 술만 들어가면 달라지셨다.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런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결혼 후 남편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남편은 "장인어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역사적인 맥락에서 아버님을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에게도 저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을 것이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맨정신으로는 차마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그 먹먹한 한을,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려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던 것은 아닐는지. 살아 생전 차마 여쭈어보지 못한 질문의 답은 훗날 저승에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어느 해인가, 지독한 태풍이 불어 닥쳐 1년 내내 땀 흘려 지은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된 적이 있었다. 다 익어가던 벼는 논물에 잠겨 싹이 났고, 주렁주렁 매달려 다 익은 사과들은 죄다 바닥에 떨어져 과수원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망연자실한 풍경 앞에서 내가 "아부지요, 우짜는기요?" 하며 속상해 발을 동동 굴렀을 때, 아버지는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 당하는 것인데 어쩔 수 없지."
자연의 이치에 따르고 순리에 순응하던 아버지였다. 애써 지은 농사를 통째로 망쳤으나, 나만의 비극이 아니라 모두 겪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그 담담한 말씀 앞에서 나는 아버지가 마치 큰 산처럼 느껴졌었다. 내 손에 든 작은 것 하나 놓치고 잃어버릴까 봐 속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나의 얄팍한 시간들이,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내게 아버지는 평생을 넘어서야 할 거대한 산이자, 닮고 싶은 대자연이었다.
스물다섯 꼭지의 글에 담긴 '광호씨'의 삶
저자는 아빠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각자의 가슴에 묻어둔 '광호씨'를 깨워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며 총 3부 25꼭지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1장 '갑작스런 이별'에서는 40대의 이른 나이에 피부암으로 투병하다 떠난 아빠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빠를 위해 마련했던 비싼 족욕기, 휴양 차 머물던 황토방, 유독 라면에 소주 마시기를 즐겼던 아빠 등 바카라 속의 세세한 이야기들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동시에 서로 관을 들겠다고 나선 이들이 많아 조율에 애를 먹었다는 장례식 풍경에서는 그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다 갔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2장 '함께 했던 시간'은 유쾌하면서도 애잔한 '단짠'의 연속이다. 딸에게 용돈까지 주며 이승기의 노래를 배우려 했으나 음치와 몸치 탓에 끝내 마스터하지 못한 귀여운 아빠, 술에 취해 자식들의 공부방 칠판을 연애편지 쓰듯 채워 넣는 아빠의 모습이 그려진다. 가난했지만 자식들 만큼은 교양 있게 자라길 바라 돈가스집에 데려가고 '오페라의 유령'을 보여주었으나, 정작 첼로 연주회에서 가장 먼저 잠들어버리는 뒷모습은 영락없는 허당 아빠이기도 했다.
3장 '못다 한 말'에서는 일찍 떠난 아빠의 뒤를 이어 조카들을 보살펴준 작은아빠와 고모부 등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내리사랑이 담겨 있다. 빵모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아빠의 예술적 내력이 프랑스 자수 작가인 고모를 거쳐 글을 쓰는 저자에게로 이어지는 대목, 아빠의 생일을 기념해 온 가족이 떠나는 여행 이야기 등은 마음을 뜨끈하게 데워준다.
이 촘촘한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마지막 주말이 겹쳐왔다. 주말 당번을 자처해 병실을 지키던 어느 날, 침상에 누워 멍하니 계시던 아버지가 혼잣말로 "이제 고만 나도 우리 엄마 만나러 가야겠다" 하셨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아무것도, 곡기는 물론 물 한 모금도 못 넘기고 계셨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평화시장을 다 뒤져 평소 좋아하시던 멍게 한 접시를 사다 드렸지만, 아버지는 그것마저 삼키지 못하셨다. 그 아버지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씀은 "우짜든동 참아라"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가 이후 우리 오남매의 인생 나침반이 되었다.
힘이 되는 존재, 아버지
젊은 날의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죽으면 그저 끝이라 여겼기에 무덤을 쓰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가시고 나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엄하고 무섭던 빈자리가 역설적으로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삶에 큰일이 생기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주저앉음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그 곁에 한참을 앉았다 오면 신기하게도 든든한 위로가 전해져 왔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보다, 돌아가신 후에 내 삶의 거대한 버팀목이자 마음의 힘이 되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호랑이 같던 아버지가 노인이 되어 사랑방에 기거하실 때, 차라리 호통치던 그때의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 짓던 기억도 이제는 모두 산소 주변의 솔바람 소리로 흩어졌다.
저자는 에세이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서 결국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게 만든다. 단 한 줄의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숨을 골라야 했다.
"아빠, 많이 보고 싶어. 정말 진심으로."
저자의 이 담백한 독백은, 오늘을 사는 내가 저 멀리 계신 나의 엄했던, 그러나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에게 평생을 건너 들려드리고 싶은 고백이기도 하다. 바카라을 조용히 덮고, 나직하게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