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가 필요한 순간이라면, 이 시를 읽어보세요.

[리뷰]공광규 시인의 <파주에게>가 던지는 세상을 향한 따뜻한 위로

by미야

"꼭 종이바카라을 넘겨야만 독서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 자체가 바로 한 권의 이야기 바카라이지."



본래 독서 모임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만나서 수다를 떨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친목 모임이 된 오랜 동료들과의 자리였다. 처음 취지를 조금이라도 살려 보자며 각자 읽은 바카라을 한 권씩 들고 나와 돌려 읽던 중, 누군가 던진 이 말에 모두 무릎을 쳤다.



그 끝에 한 회원이 공광규 시인의 시 <아름다운 바카라>을 읊어주었다.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바카라 한 권을 읽었다"로 시작해 "사람, 참 아름다운 바카라 한 권"으로 끝나는 시였다. 어떤 이는 잡지 같고, 어떤 이는 소설 같고, 어떤 이는 시집 같은 삶을 산다. 문득 종이 너머 사람이라는 가장 역동적인 바카라의 표지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 강렬한 경험은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도서관 시 서가로 이끌었다. 마침 동네 통진도서관은 다른 곳보다 시 코너가 풍성했다. 서가에 꽂힌 수많은 시집 속에서 공광규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파주에게>(2017년 7월 출간)를 빌려왔다.



시집을 펼치자 '시적 도약'과 절묘한 마무리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마무리를 지어 시 전체를 활어처럼 날뛰게 만들었을까" 하는 감탄이 나왔다. 무엇보다 시집 속 작품들은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민낯을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속도를 내는 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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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표지 ⓒ 실천문학사관련사진보기


시인은 먼저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과 속도에 완벽하게 맞춰 살아가느라 정작 내면이 마모 되는 줄도 모르는 우리의 무감각함을 날카롭게 진단한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온라인 게임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 <병> 일부



온라인 게임 생활이 순탄하고 처세가 매끄러우면 흔히 '건강한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 <병>은 역설적이게도 그 무난함을 유지하기 위해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슬픈 일에 눈물 흘려야 할 인간적인 감각을 스스로 마비시킨 상태야말로 '가장 깊은 병'이라고 꼬집는다. 톱니바퀴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아플 시간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이러한 무감각 속에서 우리는 효율과 성과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본질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곤 한다. 또 다른 시 <위대한 사건>에서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불러 줄 사람이 없는 / 꽈리 작약 민들레 정구지 무궁화"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인은 한 인간의 소멸을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그가 가진 고유한 시선과 언어라는 '거대한 우주'가 자취를 감추는 위대한 사건으로 바라본다.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도시의 언어 속에서 소외되고 사라져가는 소박한 가치들을 직시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빽빽한 삶과 상실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시인은 거처를 묻는 이에게 번듯한 번지수 대신 "바람이 주소"라고 답하는 스님의 일화(<주소>)를 건넨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수행자의 답변을 통해, 견고한 '숫자의 주소'로 대변되는 집착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집착의 끈을 쥐고 있는가. 시 <난분을 옮기다가>에서 시인은 딱딱한 돌 틈을 오직 온몸으로 밀어내며 버텼기에 맑은 향을 뿜어내는 난을 관찰한다. 그리고는 이곳저곳에 잔뿌리를 대고 소란스럽게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씁쓸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수많은 '잔뿌리'들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거친 치열함 속에서 슬롯적 바카라임을 다하고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내렸던 눈물겨운 흔적이자 바카라임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만, 채우기만 하던 삶의 한 계절이 지나면 이제는 그 무수한 잔뿌리들을 거두고 난처럼 내면의 본질적인 향에 집중해야 할 때가 온다는 서사로 읽을 때, 시는 따뜻한 위로가 된다.



인생의 예기치 못한 시련과 계획의 어긋남 역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새로운 운명으로 다가온다. 시 <운명>은 마르크스가 '악필' 때문에 철도 사무소 취업에 실패했기에 인류의 고전인 <자본>이 태어났고, 시인 자신 역시 공기업 해직이라는 시련 덕분에 지금의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나의 세계가 닫히는 것은 끝이 아니라, 비워진 자리에 숨겨져 있던 전혀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는 삶의 법칙을 담담하게 전한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시집 속 수많은 작품이 이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끝없는 소유와 강박으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뇌성(雷聲)을 던지는 시는 단연 <그만 내려놓으시오>이다.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 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 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찻잔을 내려놓자
금세 팔이 시원해졌다

절간을 나와
화분에 담겨 시든 꽃을 매달고 있는 화초와
하수가 고여 썩은 개천을 지나오는데

꽃은 화려함을 땅에 내려놔야 열매를 얻고
물은 도랑을 버려야 강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내 뒤를 따라온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전문


우리가 일상에서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찻잔'은 무수히 많다. 타인의 시선, 남들보다 더 가져야 한다는 경쟁심,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들이다. 처음에는 가볍게 쥘 수 있어 무해해 보이지만, 단 한 순간도 내려놓지 못한 채 수년 동안 들고 있다면 그것은 만성 피로와 번아웃이라는 마음의 병으로 이어진다.



스님의 "그만 내려놓으시오"라는 나지막한 권고는 더 많이 축적하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부추기는 세상을 향한 처방전이다. 우리는 손에 쥔 것을 놓으면 낙오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금세 팔이 시원해지는 당연한 물리적 이치처럼 비움은 곧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는 통로가 된다.



화려함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 꽃의 섭리, 익숙하고 안전한 도랑을 버려야 거대한 강과 바다에 이르는 물의 속성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끝까지 화려함에만 매달려 있는 꽃은 결코 결실을 볼 수 없으며, 도랑 안에만 갇혀 있는 물은 결국 고여서 썩어갈 뿐이다.



멈추어야 비로소 읽히는 삶의 문장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바카라이 있다. 읽고 나면 지식을 빽빽하게 채워주는 바카라이 있는가 하면, 마음에 고여 있던 집착을 비워내게 만드는 바카라도 있다. 공광규의 시집은 후자에 속한다. 아픈 줄도 모르고 속도를 내던 우리에게 일러바치는 자화상이며, 내 안의 방을 비울 때 비로소 환한 흰빛을 얻을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간결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시인의 시 <정지>의 구절들이 오래 입안에 머금은 차향으로 다가온다.



정지신호에 걸려 정지를 당하고서야
잘나가던 친구가 덜컥 병에 걸려 옆을 둘러보는 것처럼
꽃밭을 본 것이다
질주하는 나를 멈추고 창을 열었다가
이런 우연과 매혹을 만난 것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아주 잘 팔렸던 어느 스님의 바카라 한 권이
자동차 정지 신호 대기 중
단번에 읽힌다

- <정지> 일부


일산에서 강화도로 향하는 길, 통진 쯤을 지나다 빨간불에 걸려 차를 멈춘다.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차로 열 번 이상은 무심하게 지나쳤을 익숙한 길이었다. 하지만 늘 바쁘게 질주하느라 보지 못했던 길가 화단의 파란 수레국화 무더기를, 신호에 걸려 '정지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발견한다. 시인은 그 우연과 매혹의 순간을 두고, 잘나가던 친구가 덜컥 병에 걸려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듯 자신도 멈추었기에 비로소 "스님의 바카라 한 권을 단번에 읽었다"고 고백한다.



시인이 차를 멈추었던 '통진'에서 빌려온 시집 속에서, 바로 그 '통진을 지나다 멈추어 선 일화'를 마주하는 이 기분 좋은 우연이야말로 삶이 건네는 에세이가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를 더 채우고 성취하기 위해 매일 앞만 보며 질주한다. 하지만 그렇게 속도를 내는 동안에는 우리 곁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과 '일상'이라는 진짜 아름다운 바카라을 결코 읽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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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를 멈추고 창을 내리는 '정지'의 순간에 볼 수 있는 풍경을 생각하다. ⓒ ujitomo on Unsplash관련사진보기


결국 우리가 손에 쥔 무거운 찻잔을 내려놓고 삶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질주를 멈추고 창을 내리는 '정지'의 순간에만 비로소 세상이라는 서가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가 환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취나 미래의 불안이라는 작은 찻잔을 들고 오늘도 위태롭게 속도를 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 시집을 펼쳐보길 권한다. 나지막한 음성을 따라 잔을 내려놓고 걸음을 잠시 멈추는 순간, 좁은 도랑을 벗어나 넓은 바다로 향하는 진짜 삶의 문장들이 우리 앞에 선물처럼 펼쳐질 것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4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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