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를 고를 때마다 버릇처럼 머리를 굴렸다. 멋진 비유를 찾으려 애썼고, 인생의 거창한 진리를 한 편의 글로 완성해 보겠다는 도도한 욕심도 부렸다. 오랜 세월 동안 교단에서 늘 정답을 가르치고 정돈된 문장을 쓰는 일에 익숙했던 탓일까. 은퇴 후 마주한 내 글은 언제나 딱딱했고, 머리보다 한 박자 늦게 출발하는 말들은 종이 위에서 자주 겉돌았다.
새로운 길 위에서 매일 흐르는 물에 글씨를 쓰듯 무언가를 적어나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어느 필사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시인 이성복의 구술 시론집 <무한화서(無限花絮)>를 읽게 되었다.
▲도서 <무한화서> 표지
'끝없는 꽃차례'라는 서정적인 이름과 달리, 바카라장을 넘길 때마다 마주한 시인의 구술들은 글을 쓰겠다고 겁 없이 덤벼든 내 안일한 태도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매서운 일갈이었다. 번호가 매겨진 470개의 짧은 구술들을 한 문장 한 문장 입안에 넣고 틔우느라, 이 얇은 바카라 한 권을 덮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밖에서 속으로 피어나는 꽃, 무한화서
시인은 바카라의 첫 페이지, 0번 구술에서부터 바카라의 제목이자 자신이 지향하는 시의 본질을 명징하게 선언하며 시작한다. 화서(花絮)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뜻하는 순우리말 '꽃차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단다.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피어나지만,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가장 비천한 변두리(밖)에서 가장 거룩한 중심(속)으로 피어 들어간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야말로 바로 이 무한화서의 속성을 닮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본질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면서도, 그 실패를 동력 삼아 무한히 뻗어 나가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장엄한 선언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에 깊은 울림이 일었다.
바카라의 전반부(19~99번)는 주로 '언어'를 다룬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생각에 의지하면 항상 늦으니 머리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몸에서 바로 꺼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치 축구선수들이 앞이 막히면 패스하고 달려 나가듯 먼저 언어를 띄워주고 그다음에 궁리하라는 비유(22번)는 무릎을 치게 만든다.
특히 단정적인 어조를 썼던 맹자보다 판단을 유보하는 어조를 즐겨 쓴 공자의 태도를 전하며 '말은 작고 가볍게 해야 한다'(35번)고 짚어주는 대목이나, 조사와 접속사를 바꾸는 것이 일상의 닳아 빠진 관절을 갈아 끼우는 것(91번)이라는 대목에서는 오랫동안 가져온 내 글쓰기 습관이 부끄러워져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구제하는 문학
중반부 '대상'을 다루는 장(103~195번)으로 넘어가면 시인의 시선은 더욱 깊고 애잔하다. 시인은 거창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하려 하지 말고, 그냥 우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쓰라(71번)고 권한다. 문학이란 세상에서 버림받은 쓸모없는 것들을 구제하는 일(118번)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들려주는 조언은 지극히 평범해서 더 서글프다. 입가에 말라붙은 침 자국, 주방 환풍기에 달라붙은 기름때, 변기 앞에 떨어진 오줌 방울(125번)에서 의미를 찾아주는 것이 시인의 몫이란다. 자면서 코를 고는 개들의 모습에서 우리 어머니와 자식과 나 자신을 발견한다(114번)는 대목을 읽을 때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정작 할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에 말이 많아지는 것이니(76번), 슬픔이 왔을 때는 태연히 시치미를 떼며 말을 숨겨야 한다(239번)는 시인의 서슬 퍼런 다그침 앞에서는 지금까지 쓴 내 모든 글들을 다 지워버리고 싶어졌다. 그동안 나는 낯설게 하기와 비틀기를 한답시고 얼마나 빤한 말장난과 뭉툭한 표현들로 멋을 부렸던가.
실패할 싸움에 올인하는 사마귀처럼
기나긴 구술의 호흡은 바카라의 말미, 삶을 다루는 장(390~470번)에서 마침내 글 쓰는 이의 태도와 도리로 수렴된다.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곧 인생을 바꾸는 것이며, 글쓰기 외에 다른 천국은 없다(415번)고 단언한다. 그리고 마지막 470번 구술에서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사마귀를 불러내어 우리에게 친절하면서도 거친 가르침을 남긴다.
사마귀가 겁 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대적하는 것처럼, 시를 쓴다는 것은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란다. 하지만 아름드리나무 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을 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올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이 속절없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고 시인은 일갈한다.
바카라장을 덮으니 사위가 고요해진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 사람이 되고서야 비로소 글이 되고 시가 된다는 준엄한 진실이 마음 바닥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시인의 시론을 읽다 보니 불현듯 시 한 편을 쓰고 싶어지기도 했고, 말장난을 툭 내뱉듯이 무심하게 입안에서 말을 굴려보기도 했다.
내가 앞으로 갈고닦아야 할 길은 아득하여 차마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멀고 험해 보인다. 하지만 누군들 처음부터 완벽할 수 있겠는가. 국밥집에서 국을 담기 전 그릇을 먼저 덥혀놓듯(363번), 나 자신을 늘 따뜻하게 달구어놓으리라 다짐해 본다.
원고지를 스캔하며 첫 문장을 고민해 본다. 비록 수레바퀴를 가로막는 사마귀의 가냘픈 발짓일지라도, 온 삶을 던져 나만의 혼잣말 같은 진실을 툭 던져보리라. 밑에서 위로, 변두리에서 중심을 향해 피어날 나의 작은 무한화서를 기다리는 지금, 벌써 내 마음이 흐뭇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