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시침은 몇 시에 맞춰져 있는가

장석주, <스무 살은 처음입니다> 읽고, 그들의 불손한 스물을 용서하다

by미야

시집을 빌렸다. 마산도서관에서.


열댓 권을 한꺼번에 빌려 나오면서도 마음이 호기롭지만은 않았다.

시집이라고, 얇고 짧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래, 신록이 눈부셔서라고 해두자. 그 눈부심에 홀려 덥석 시인의 생을 집어 들었다고.


충동적이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부도덕하고. 기형적이고 불구인 시인의 스물을 대면하고 나니 가슴 밑바닥에 눌러두었던 한숨이 비로소 낮게 내쉬어진다.


'그랬구나. 너희도 그 스물의 혈기가 버거웠구나. 그 뜨거운 피를 어디다 던져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본의 아니게 헐떡였구나.'


금수처럼 생생하고 적나라한 육체성으로 표현되던 그 남성적인 스물을, 나는 이제야 용서하기로 한다.


사실 나라고 별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 삶에는 깊이도 없고 넓이도 없고, 더구나 부피는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이불을 시치던 어미의 흔적만 남아 스물을 세 번이나 살고도 여전히 허우적댄다. 젊은 한때, 낭만과 우아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숭고해야 한다는 강박이 낳은 기형아. 그게 나의 스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모호한 불안과 갈망에 휩싸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너희도 그 세월, 같은 불길 속을 견디는 중이었구나.


시인은 말한다.

중년의 초입에서 불현듯 젊은 날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시로 마구 쏟아져 나왔노라고. 꺼져가는 남성성을 붙들고 미혹한 스물의 서툼으로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라고. 이제 이런 서툴고 아름다운 시는 쓸 재간이 없다는 그의 말에 나도 일부 동의한다. 나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바카라장을 넘기며 숨을 멈추고 두번 세번 되새겨 읽었던 , 나는 잊고 지낸 '상자'들을 꺼내본다.


실패한 인생엔 상자가 없다


이 저녁 누군가 문설주에 기대 울고 있다면 내 탓이라고 알아다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라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내가 상냥한 미소를 짓지 못했던 것은 인생의 쓰디쓴 실패를 자인한 탓이다/내가 가졌던 상자들을 모두 잃어버린 탓이다/상자마다 피어나는 꽃들, 가득했던 별들, 가르릉거리는 예쁜 새끼 고양이들... /이제 내겐 상자가 없다


한때 내 안에도 그런 고귀하고 빛나는 것들로 채워진 상자들이 분명 있었다. 인생을 이만큼 살아온 이력으로, 내 손에 이루었다고, 잡았던 것들의 실체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이제 내게도 그 상자들은 없다.


"나는 무얼 믿었나? 아니, 믿기는 했나? 나는 믿는다는 유전자 자체가 결여된 기형아였던가. 절실한 그 무엇이 분명 있었으련만 그 모든 것을 잊었다. 나의 근간을 잊었다. 아니, 나에게 근간이라는 것이 있기나 했던가."


그 막막한 물음 끝에 시인은 다시 스물의 나를 소환한다.


한심했었지, ~하는 일마다 실패투성이였지. ~내 생은 불만으로 부풀어 오르고 조급함으로 헐떡이며 견뎌야만 했던 하루하루는 힘겨웠지. ~불안은 나를 수시로 찌르고 미래는 어둡기만 했지. 그랬으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바다 속을 달리는 등푸른 고등어 떼처럼 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_<내 스무 살 때>의 일부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도 그게 무지(無知)인 줄로만 알고 퉁퉁 부어 화만 냈던 시간들.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너무 멀리 와버린 그대와 나에게, 시인은 묻지 말고 그냥 가자고 손을 내민다.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고.


시집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생각한다.


내 인생의 시침은 지금 몇 시에 맞춰져 있는가.

나는 몇 시에 내 인생의 시침을 맞추고 싶은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미래의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낡은 타자기를 두드리듯 밤새 무언가를 써내려가던 그 절실함을 되찾고 싶다.


비록 상자는 비어버렸고 구두는 낡았지만, 초록 일색으로 번져 있는 풀들을 보며 다시 화엄경을 읽듯 생을 마주한다. 아무 슬픔도 없는 것들이 모의하듯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저 개나리꽃들처럼, 나도 이제 내 안의 응달을 빛으로 조금씩 채워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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