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렁증을 다스리며 읽은 사랑 이야기

리뷰] 이병률 산문집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를 읽고

by미야

오랜만에 돌아온 집, 그 며칠 사이 거실 창 한 면이 온통 대왕참나무의 초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쭈쭈' 응원하지 않아도, '오구오구' 칭찬하지 않아도 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대왕참나무. 누가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우쭐하지도 기죽지도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무엇을 어쩌겠다는 작정도 없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 혼자 열병 앓듯 그 색을 어쩌지 못해 똥마려운 강아지 마냥 우왕좌왕합니다. 라디오를 켰다가 유튜브를 켰다가 차를 마셔봐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하나가 자꾸 갈비뼈 밑을 간질간질하게 만듭니다.

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 간지러움을 그렇게라도 뱉어내지 않고는 저 대왕참나무가 만든 여름 길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문을 열면 그가 손을 불쑥 들이밀 것만 같습니다. 그토록 가까이 와버린 저 초록잎을 어째야 한단 말입니까. 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초록에 어질어질하고 울렁거려서, 그 울렁거림을 잠재우려 이병률의 산문집을 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2022년 9월 출간)


이것은 영락없는 이별의 소식이 아닙니까? 하지만 어지럼증과 울렁증을 가라앉힐 방법은 이 바카라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죽도록 사랑하던, 아니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던 고백하지 못한 사랑이 돌아서 간 후의 이야기일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사람을 진정 사람이게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그리움의 인자 때문일 것이고, 바로 그 그리움 때문에라도 사람은 섬뜩할 정도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가지고 사는 건지도. 사랑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각자의 이야기일 뿐이고 그래서 슬프고 충분히 쓸쓸하다."


사랑이란 슬프고 충분히 쓸쓸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것. 그러니까 사랑은 이별하지 않아도 사랑인 채로 슬프고 쓸쓸하다는 말에 제 예상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냥 사랑 이야기를 하겠다고 합니다. 저 초록을 눈앞에 앉혀두고 저는 그 사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울렁증을 다스려 보려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손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당신 손에 관한 글을."


내가 당신에 관해 글을 쓴다면 무엇에 대해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이 문장 앞에 오래 머물러 보았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서, 아주 오래도록. 하지만 오래 머물러도 당신의 하나, 딱 하나만을 떠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냥 당신 전체가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손을 생각하면 갸웃하게 되고, 말만 하면 따뜻함과 너그러움, 평온이 가득 채워지는 당신의 큰 입을 생각해도 그것만으로는 당신을 온전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바로 저 대왕참나무 같은 사람이니까요. 거 봐요, 이병률 작가는 이 바카라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한 플로리스트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가 뭐예요? 난 서슴없이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랑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사랑이요. 도처에 널려 있는 사랑, 다요. 그랬더니 그렇게 피해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21p, '뿌리째 아름다운 일' 중에서)


사랑 빼고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낸단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의 이야기는 사랑이어야 하는 거지요. 그 사랑은 대놓고 '사랑한다', '안고 싶다'가 아니라 은유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유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밤하늘 별만큼이나 설레게 하는 포인트가 되니까요.


그대도 몹시 보고 싶다는 말 대신 "바람이 붑니다"라고, "솔숲을 걷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곤 하지 않습니까? 그 말들에 얼마나 가슴 설레었는지요. 그럴 때면 저는 바람이 되어 당신의 볼을 스치고, 오솔길이 되어 당신 곁으로 달려가곤 했었지요.


사랑에 대하여 알고 싶나요?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싶나요? 당신의 그를, 혹은 그녀를 소환하고 싶나요? 달달하고 쌉싸름하고 시큰텁텁하고 간질간질하고 아찔하고... 그렇다면 이병률의 문장들을 만나보세요.


누군가의 이야기에 슬쩍슬쩍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 넣어 숨겨둔 이 바카라은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가상인지 헷갈릴 만큼 온통 사랑에 대한 열기로 가득합니다.


[바카라 속의 문장들]

"사랑은 죽은 사람을 깨우기도 합니다.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정신 차리게도 하고, 제정신인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도 하는, 세상의 모든 축제를 한데 몰아넣고 끓이는 용광로가 사랑인 겁니다. 그렇더라도 내 사랑은 작습니다. 비틀비틀 빛나는 별처럼 작습니다. 내 사랑은 말줄임표일지도 모르며, 직접 말하지 않는 그놈의 메타포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26p)


"어느 낯선 곳에서 혼자 맞이한 아침... 누군가 덜커덩 떠오르고 차올랐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그 사람을 완벽히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당신이 왜 무작정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 건지... 이 정도라면 당신은 그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3p)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바다에 가자는 말은 사실 사랑한다는 말이며, 노을을 보러 가자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깊은 밤 불쑥 산바카라하고 싶다고 보내는 것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벚꽃 보러 가자는 말을 당신에게 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리학자 아서 아론의 실험 중 "1년 뒤 갑자기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 삶의 방식 중 어떤 걸 바꿀 건가요?"라는 질문에 작가는 답합니다.

그저 사랑하다가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죽을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보다 열 배는 더 살아있는 말이고 스무 배쯤 더 말이 되는 말이니까요.


초록이 쏟아지는 창가에서 이 바카라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나의 은유는, 나의 메타포는 오늘도 당신을 향해 흐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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