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스마트폰 알림이 울린다. 낯선 이름으로 달린 블로그 댓글이다. “오늘 최종 합격했습니다. 3년 전 남겨주신 댓글 하나가 제 준비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K씨는 짧은 문장을 세 번이나 다시 읽는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다. 3년 전, 취업준비생들이 모이는 온라인 카페에서 자기소개서에 관한 조언을 몇 차례 남긴 적이 있었다. 그중 두세 줄이 누군가에게 닿았고, 3년이 지나서야 결과가 돌아온 것이다.
그는 한동안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놓지 못한다. 대기업 인사 부문에서 일한 26년, 퇴직 후 방향을 잃고 보낸 시간, 다시 자신의 경험을 꺼내기 시작한 지난 몇 년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26년 동안 받은 연봉보다, 이름 모를 사람에게서 온 이 댓글 하나가 더 크게 다가온다.
퇴직 직후 그는 매일 아침 정장을 입고 서재에 앉았다. 출근하지 않는 하루도 회사에 다닐 때처럼 살고 싶었다. 신문을 읽고, 경제 뉴스를 정리하고, 예전 동료들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흉내 내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넉 달이 지나자 정장은 옷장에 그대로 걸려 있었고, 하루는 갈수록 길어졌다.
K씨는 대기업에서 26년간 일했고, 마지막 8년은 인사담당 임원이었다. 채용에서 평가와 승진, 퇴직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조직 안 생애주기를 다뤘다. 정년을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했을 때만 해도 스스로 준비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퇴직금과 연금 계획을 세워두었고, 건강도 비교적 잘 관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돈도 건강도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뜬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있을 때 그는 매일 누군가의 채용을 결정하고, 누군가의 승진을 심사하고, 누군가의 퇴직을 검토했다. 그런데 이제 그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결정할 것이 없는 하루가 이렇게 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내는 종종 물었다. “요즘 하고 싶은 일 없어?” 그는 그때마다 대충 얼버무렸다.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랫동안 회사가 대신 정해주던 방향이 사라지자, 스스로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감각도 함께 희미해져 있었다.
전환점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아왔다. 대학생 딸이 취업 준비 자기소개서를 보여달라며 노트북을 내민 것이다. K씨는 별생각 없이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지원 동기가 추상적이고, 경험이 나열되어 있으며, 정작 그 경험이 무엇을 증명하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문장을 하나씩 고쳤다. 질문을 던지고, 빠진 장면을 찾아내고, 경험의 의미를 다시 정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26년 동안 지원자의 문장을 읽어온 눈이 아직 살아 있었다. 며칠 뒤 그는 딸이 이용하던 취업준비생 온라인 카페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단지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자기소개서 첨삭 게시판에 올라온 글 몇 개에 짧은 댓글을 남겼다. ‘지원 동기가 회사 설명에 머물러 있습니다.’ ‘경험을 나열하지 말고, 그 경험으로 무엇을 배웠는지 보여주세요.’ ‘이 문장에서 드러나야 할 것은 성실함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한 방식입니다.’
다음 날 확인해보니 댓글 아래에 감사 인사가 달려 있었다.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인사 업무를 하셨나요?’ K씨는 짧게 답했다. ‘네, 26년 정도 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매일 저녁 한 시간씩 카페에 들어갔다. 돈을 받는 일도 아니었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중 자신이 가장 쓸모 있다고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의 댓글을 일부러 찾아 읽는 사람들이 생겼고, 카페 운영자는 그를 정식 멘토로 초대했다. 익명의 몇 줄에 이름과 얼굴, 그리고 26년의 경력이 붙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났을 무렵, 한 중소기업 대표가 연락이 왔다. 카페에서 K씨의 글을 보았다며 신입사원 채용 과정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대가 없이 나누던 일을 돈을 받고 하게 되면, 지금까지 느끼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잘하는 일에 값을 받는다고 해서, 그 나눔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K씨는 첫 유료 프로젝트를 맡았다. 일이 끝난 날, 그는 노트에 원칙 하나를 적었다. 유료 컨설팅은 생계를 위한 일이었고, 무료 첨삭은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두 가지는 경쟁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산을 지켜주는 일이었다.
이후 입소문을 타고 의뢰가 이어졌다. 몇 년 뒤에는 채용 컨설팅과 이력서 코칭을 병행하는 작은 사업체를 꾸렸다. 수입은 임원 시절 연봉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는 처음에 정한 원칙을 지켰다. 매달 일정한 시간은 카페의 무료 첨삭에 남겨두었다.
유료 컨설팅이 그의 돈 자산을 지켜주었다면, 무료 첨삭은 의미 자산을 지켜주었다. 사업이 바빠지면서 무료 활동을 줄이고 싶은 유혹도 생겼다. 실제로 몇 달 동안 거의 참여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새로운 의뢰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확인해 보니 고객 상당수가 과거 카페에서 그의 조언을 읽었거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추천으로 찾아온 이들이었다.
나눔을 멈추자 순환도 함께 느려졌다. 그는 다시 저녁 한 시간을 카페에 돌려놓았다. 의뢰를 늘리기 위한 계산은 아니었다. 자신이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이유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간이 새로운 관계와 신뢰를 다시 불러왔다.
오늘 밤 도착한 댓글은 그가 아직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활동하던 시절에 남긴 것이었다.
그는 그제야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돈을 받고 한 첨삭보다, 이름 없는 사람에게 건넨 두세 줄이 3년을 건너 돌아왔다는 것을.
이 바카라은 지금까지 여섯 가지 존엄 자산을 다뤄왔다. 돈은 선택권을 지키고, 건강은 그 선택을 실행할 몸을 만든다. 일은 자신의 능력을 슬롯 속에서 펼칠 자리를 제공하고, 관계는 무너졌을 때 붙잡아주는 그물이 된다. 배움은 이 모든 자산이 시대와 함께 낡지 않게 하며, 의미는 그것들을 왜 쌓고 있는지 방향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자산들을 자기 안에만 쌓아두면, 결국 한 사람의 삶 안에서만 작동한다. 나눔은 새로운 일곱 번째 자산이라기보다, 앞서 쌓은 여섯 자산이 다른 사람의 삶으로 건너가는 방식이다. 지식은 가르칠 때 살아나고, 경험은 나눌 때 다시 쓰이며,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때 넓어진다. 의미 역시 누군가의 삶에 작은 변화를 만들 때 더 선명해진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생 후반부의 중요한 과제를 다음 세대에 기여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하려는 마음으로 설명했다. 흔히 ‘생성감’ 또는 ‘생산성’이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반대로 가진 것이 안에서만 맴돌고 다음 세대로 흐르지 못하는 상태를 침체라고 보았다.
침체는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경험은 많지만 흘러갈 곳이 없는 상태다. 퇴직 후 K씨가 보낸 넉 달이 그랬다. 26년의 지식과 판단력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딸의 자기소개서를 고쳐준 날, 막혀 있던 자산이 처음으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15장에서 발견한 판단력 자원과 17장에서 이름 붙인 재능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순간 다시 살아난 것이다. K씨 안에만 있을 때 그것은 지나간 경력이었다. 누군가의 첫걸음을 돕는 데 쓰였을 때 비로소 현재의 자산이 되었다.
나눔은 손해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눔을 반드시 수익으로 돌려받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순환이다. 경험을 나누면 관계가 생기고, 관계 속에서 신뢰가 자란다. 신뢰는 때로 새로운 기회로 돌아오고, 때로는 감사의 한마디로 돌아온다.
무엇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흘려보낸 경험은 대개 다른 형태로 삶에 남는다.
여기서 나눔은 자신이 가진 자산을 검증하는 시험이 되기도 한다. 지식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아직 충분히 자기 것이 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아직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과정에서 비로소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잘하며, 무엇이 정말 도움이 되는지가 분명해진다.
1장에서 만난 A씨는 회사 밖에서 자신의 경력을 설명할 언어가 없어 오래 헤맸다. K씨도 처음에는 비슷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경력을 소득으로 바꾸기 전에, 누군가의 첫걸음을 위해 먼저 꺼내놓았다. 돈이 걸리지 않은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진짜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더 솔직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눔은 재능을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무대다. K씨는 요즘 후배 멘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는 것은 사라지는 것 같지만, 받는 것보다 오래 남습니다.”
26년 동안 월급을 받으며 일할 때는 알지 못했던 문장이다. 대가 없이 몇 줄을 건넨 뒤, 3년을 건너온 감사 인사를 받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36장에서는 이 나눔을 시작하기 위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문턱을 다룬다. 무엇을 나눌지 알아도 시간과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익숙한 일을 조금 내려놓고 새로운 역할로 이동할 때 필요한 용기, 곧 불타는 갑판에서 내려올 용기를 이야기한다.
쌓아둔 자산은 한 사람의 삶에 머물지만, 나눈 자산은 다른 사람의 삶에서 다시 시작된다.
SELF COACHING
경험은 저절로 자산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의미를 발견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자산이 된다. 잠시 바카라을 덮고, 아래 질문을 통해 나만의 경험을 미래의 기회로 연결해 보자.
① 돌아보기 — 최근 1년 동안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건넨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가?
② 깨닫기 — 나는 지금 가진 것을 흘려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정체시키고 있는가?
③ 발견하기 —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경험 중 누군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④ 선택하기 —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가장 작은 몫은 무엇인가?
⑤ 실행하기 — 이번 주, 한 사람에게 내 지식이나 경험 하나를 구체적인 말이나 글로 건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