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딸에게, 그리고 나에게

by김상범


그날 딸은 거울 앞에서 한 문장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면접을 앞둔 딸이 안쓰러웠습니다. 조금 더 준비하면 덜 떨 수 있을 텐데, 다음에는 저 문장을 끝까지 말할 수 있을 텐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카라을 다 쓰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준비가 필요한 사람은 딸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습니다. 회사에 들어가 실적을 내고, 승진하려 애썼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회사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서른이 넘어 다시 공부했고, 마흔이 다 되어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바카라을 쓰고 코칭을 배웠고, 회사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잘한 선택도 있었고, 지금 돌아보면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싶은 선택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보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일하며 살아갈 20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저 역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무엇은 이제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느 밭에서 다시 신인이 되어야 하는지 아직 답을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바카라은 누군가에게 정답을 알려주기 위해 쓴 바카라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해보려고 쓴 바카라에 더 가깝습니다. 딸의 면접에서 시작된 질문이었지만, 서른 장을 쓰고 나니 그 질문은 결국 제게 돌아와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일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아버지 세대가 일을 마칠 즈음 자녀 세대가 슬롯에 들어온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세대가 물러나고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채우는 모습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앞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세대도 생각보다 오래 일하게 됐습니다. 딸 세대가 슬롯에 들어왔지만 저도 아직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딸이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 저도 배워야 하고, 딸이 새로운 기회를 찾을 때 저도 다음 일을 찾고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같은 기회를 놓고 경쟁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경험과 기술을 나누며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는 다르지만 같은 시대의 변화를 함께 통과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다만 먼저 조금 살아본 사람으로서 나눌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처음부터 정답을 몰라도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 잘못 골랐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고를 수 있었다는 것, 늦게라도 다시 배우면 전혀 다른 길이 열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바카라에 적어놓은 생각들은 제가 처음부터 알고 있던 답이 아닙니다. 살아보고, 틀려보고, 돌아가보고, 다시 시작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딸에게도, 이 바카라을 읽는 자녀 세대에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남기는 것을 돈으로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돈은 중요하고, 저 역시 가족에게 가능하면 더 남겨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남겼는지만큼 어떤 삶을 살아냈는지도 함께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다만 한 가지쯤은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아빠도 자기 인생의 답을 처음부터 알고 살지는 않았다는 것. 그래도 늦게 공부했고, 새로운 일을 배웠고, 회사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고, 필요하면 또 다른 밭을 찾아갔다는 것.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인생을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였다는 것. 그 정도면 저는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제가 딸에게 남길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빠처럼 살아라”는 답이 아니라,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삶을 다시 물을 수 있고 필요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한 사람의 사례 말입니다.

그날 거울 앞에서 울던 딸을 보며 저는 딸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 세상에 나가 자기 몫의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원래 그렇게 무거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떨리지 않는다는 뜻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뜻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는 각자의 밭에서 비슷한 시기에 다시 신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사이가 아니라, 먼저 조금 살아본 사람과 이제 자기 길을 살아가는 사람이 같은 시대를 함께 배우는 사이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딸이 다시 거울 앞에 서는 날이 온다면, 저도 어딘가에서 제 다음 일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저도 제게 같은 말을 해보려고 합니다. 딸도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처럼 목소리는 또 떨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문장은 전과 다른 뜻으로 들릴 것 같습니다. 면접관에게가 아니라, 각자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자신에게.


“저는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일하면서 다음 밭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