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서 다음 밭을 준비한다

by김상범

2012년 회사를 나왔을 때 저는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박사학위가 있었고, 코치 자격이 있었고, 바카라 네 권이 있었습니다. 회사를 나온 뒤 급하게 만든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회사에 다니는 동안 조금씩 준비해온 것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한 밭에서 수확하면서 옆 밭을 조금씩 갈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공부와 바카라과 자격이 나중에 어떤 일로 이어질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지금 하는 일만으로 내 인생 전체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하면서도 조금씩 배우고, 쓰고, 다른 가능성을 준비했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그 준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았습니다. 다음 밭은 지금 밭이 끝난 뒤보다, 아직 수확하고 있을 때 준비하는 편이 낫습니다.


2012년 회사를 나와 혼자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하나씩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박사학위와 코칭 경험은 강의와 자문으로 이어졌고, 바카라은 제가 어떤 문제를 고민해왔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전환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019년에는 다시 회사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일하며 얻은 경험을 가지고 조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2025년에는 다시 회사를 나왔습니다. 전환은 언제나 회사 밖으로 나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조직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새로운 경험을 쌓은 뒤 다시 다른 밭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인생 다모작은 한 방향으로 올라가는 경력의 사다리라기보다, 필요할 때 밭을 바꾸며 여러 번 ‘배움 — 일 — 전환’을 살아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두 개의 시간을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는 지금 밭의 시간이었습니다. 출근하고, 맡은 일을 하고, 실적을 내고, 조직의 목표를 따라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음 밭의 시간이었습니다. 공부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지금의 온라인 게임 밖에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을 조금씩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밭에서 제대로 수확하면서 다음 밭의 파종도 준비하는 것입니다. 회사 일을 대충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맡은 일을 제대로 해야 다음 밭으로 가져갈 것도 생깁니다. 고객을 상대해본 경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경험, 사람을 이끌어본 경험도 대부분 지금 밭에서 얻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밭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준비 없이 한 밭을 떠나면 많은 것을 그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을 할지 정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알아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시험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소득까지 줄어든다면 마음이 급해집니다.


마음이 급해지면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정말 원하는 길보다 당장 돈이 되는 일을 선택할 수도 있고, 충분히 알아보지 않은 채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들어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밭을 준비한다는 것은 공부를 미리 해두는 일만은 아닙니다. 다음 선택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만드는 일입니다.


농사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지금 밭의 수확을 모두 끝낸 뒤 옆 밭의 돌을 치우고 흙을 갈기 시작하면 다음 파종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수확하는 동안 옆 밭을 조금씩 준비해두면 옮겨야 할 때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완벽하게 갈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돌 몇 개라도 먼저 치워두면 됩니다.


불안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제가 다른 밭을 보기 시작한 데에는 불안도 한몫했습니다. 회사가 힘들 때면 다른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했고, 바카라을 썼고, 자격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불안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밭을 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한다면 한 가지는 다르게 할 것 같습니다. 불안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잘되고 있을 때 다음 밭을 준비할 것입니다.


위기가 닥친 뒤에는 선택보다 탈출이 먼저가 되기 쉽습니다. 승진에서 밀리고, 조직개편 이야기가 들리고, 회사 사정이 나빠진 뒤에야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하면 무엇이 나와 맞는지를 천천히 살펴볼 여유가 줄어듭니다.

반대로 월급이 나오고 있고, 현재 일이 잘되고 있고, 당장 옮길 이유가 없을 때는 시험해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워보고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관심 있는 일을 작게 경험해보고 생각과 다르면 멈출 수도 있습니다. 몇 달을 시도했는데 성과가 없어도 생계가 당장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위기가 오기 전에 만든 선택지는 위기가 왔을 때 시간을 벌어줍니다.


작게 밟아본다

다음 밭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서는 알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좋아 보였는데 직접 해보니 맞지 않을 수 있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의외로 잘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시작하기보다 작게 밟아보는 편이 좋습니다.


글 한 편을 써볼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실제 업무 하나에 써볼 수도 있고, 가능한 범위에서 작은 프로젝트를 경험해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두 번째 직업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다음 밭을 현재의 생계까지 걸기 전에 조금이라도 경험해보는 것입니다.


농부도 밭을 사기 전에 흙을 봅니다. 물이 어떻게 드는지 살피고 무엇을 심을 수 있을지 알아봅니다. 인생의 다음 밭도 같습니다. 멀리서 보기만 할 때와 직접 발을 디뎌볼 때는 다릅니다.

준비의 크기도 클 필요는 없습니다. 회사 밖에 남기는 글 한 편일 수도 있고, 새로 배우는 기술 하나일 수도 있고, 평소 만나지 않던 분야의 사람 한 명을 만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준비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밭이 끝나기 전에 시작했는가입니다.

다음 밭을 준비한다고 현재의 일을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얻고 있는 것을 모두 오늘을 위해 쓰지 않고 일부를 다음 농사를 위해 남겨두는 것입니다. 월급이 나오는 동안 시간을 조금 떼어 배우고, 지금 하는 일에서 얻은 경험을 기록하고,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도 그런 준비입니다.

한 번에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옆 밭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선택지가 있으면 지금 밭에서도 달라집니다

다음 밭을 준비하는 이유는 훗날 회사를 떠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선택지가 생기면 지금 밭에서 일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회사 하나에 내 인생 전체를 걸고 있으면 승진에서 밀리거나 조직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곧 인생 전체의 문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밭에 작은 씨앗 하나라도 심어두면 ‘여기가 전부는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더 차분하게 남을 수 있습니다. 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버티는 것과, 남을지 옮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일하는 것은 다릅니다.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떠나기 위한 준비만이 아닙니다. 남을지 떠날지를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준비입니다.

그래서 인생 다모작의 목적은 계속 직업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꿀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평생 한 분야에서 일해도 괜찮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오래 일해도 됩니다. 준비했던 다음 밭을 끝내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실패는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남은 것과 선택할 수 없어서 남은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밭을 소홀히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밭에서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거두면 됩니다. 다만 모든 수확을 오늘 다 써버리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일부는 다음 농사의 씨앗으로 남겨두십시오.

아직 일이 잘되고 있을 때 옆 밭의 돌을 몇 개 치워두십시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작은 일을 시험해보고, 지금의 자리 밖에서도 이어질 무언가를 하나씩 만들어두십시오. 언젠가 옮겨야 할 날이 왔을 때 빈손으로 나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늘, 지금 하는 일과 별개로 1년 뒤에도 남을 것 하나를 정해 30분만 써보십시오. 다음 밭의 첫 고랑은 그렇게 파입니다.

그런데 옆 밭을 미리 갈아두었다고 바로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씨앗을 심고도 오랫동안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올 수 있습니다. 준비는 미리 할 수 있지만, 수확의 때까지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셀프 코칭

- 지금 일을 계속하면서 1년 뒤까지 준비해둘 수 있는 다음 밭의 씨앗 하나는 무엇입니까?

- 그 씨앗을 위해 이번 주에 시작할 가장 작은 행동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