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한담(摹瑟閑談) 6 : 가난

일간 김경윤 149

by김경윤

1.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 때 성적표를 받으면 수우미양가로 등급이 표기되었다. 수우미양가. 한자를 병기하면 이렇다. 수(秀) 우(優) 미(美) 양(良) 가(可). 다섯 등급인데 모두 괜찮은 말이다. 우수하다, 넉넉하다, 아름답다, 좋다, 괜찮다. 특히 마지막 등급에 해당하는 한자 가(可)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옳다, 좋다, 허용된다, 가능하다, 찬성한다는 뜻은 모두 가(可)에 담겨있다.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그래서 꼴찌여도, 적어도 가능성만큼은 허용되는 아름다운 등급표시다. 그에 비해 대학시절 영어로 ABCD로 표기되는 성적등급은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순서대로 줄을 세운 것이다. 게다가 꼴찌는 E가 없이 곧장 F로 간다. 다른 건 몰라도 F는 분명 실패(탈락)의 뜻을 가진 Failure / Fail의 약자일 것이다. 인정사정 없다. 단칼에 날려버린다. 루저가 된다. (학생에게 참으로 가혹한 평가로다!)


2.

왜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냐 하면, 오늘 갑자기 '가난'이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들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자본주의 슬롯에서 '가난'은 여러 상태 중 하나가 아니라 실패한 상태를 표상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과거에 아름다운 단어로 쓰였던 청렴(淸廉), 청백(淸白), 청빈(淸貧) 따위는 이제 거들떠보지도 않는 단어들이다. 정직하고 가난하여 칭찬받던 청백리(淸白吏), 즉 가난하지만 멋진 공무원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처세에 능하지 못한 낙오자처럼 취급받는다. 나는 오늘날의 청년(靑年)이란 단어가 청렴(淸廉), 청백(淸白), 청빈(淸貧)들과 연결되지 않고, 그냥 가난과 연결되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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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장자, 예수, 부처, 디오게네스를 좋아하는 인문학 작가입니다 . 인문학적 소재로 30여권의 바카라을 썼습니다. 현재 가파도 매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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