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 준 사람

by쪼이



지금까지 회사 생활을 7년 넘게 하면서, 새해라면서 윗사람에게 인사를 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올해 2026년을 맞이하면서는 꼭 연락을 드리고 싶은 분이 계셨다. 바로 한 해 동안 나와 함께 일한 우리 그룹장님이시다.


약 2주 전 월요일 아침, 갑자기 그룹장님이 긴급이라며 전체 그룹원들을 회의실로 부르셨다. 살짝 늦게 출근하고 있던 나는 서둘러 회의실로 뛰어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한 자리에 모인 얼굴들을 쭉 훑어보는데 그룹장님이 입을 여셨다. “여러분, 제가… 떠나게 되었습니다.” 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다다다다 쏟아냈다. 어디로 가세요? 언제부터 가세요? 어쩌다 가게 되셨어요? 저희는 어떻게 되나요? 저희 업무는… 나는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내가 이 그룹에 합류하게 된 게 2024년 연말이었으니, 그룹장님과 함께 한 것은 1년이 조금 안 된다. 그 1년은 만 7년이 넘는 내 회사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은, 상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인상 깊은 시간들이었다. 처음 부서를 옮기고 한 달쯤 되었으려나. 뭔가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어서 한창 회의를 하던 중, 저녁 먹고 나서 7시 반에 다시 시작하자며 다들 일어나는데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나뿐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 대체 집에는 언제 가려는 건가, 하면서 식당으로 가는데 옆에서 함께 걷던 그룹장님이 중얼거리시는 소리가 들렸다. ‘재밌군, 재밌어…’ 표정을 보았는데 진짜 흥미롭다는 듯 웃고 계셨다. 처음이었다. 일을 ‘재밌다’고 생각하는 보온라인 게임은. 놀란 나는(그리고 너무나 투명한 나는) 또 그 감상을 바로 입밖에 내뱉었다. “와, 그룹장님, 신기해요. 이전 부서에서도 다들 열심히 늦게까지 일하셨긴 한데, 일에 찌든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룹장님은 전혀 안 그러시네요!” 그룹장님은 그냥 허허 웃으셨지만, 나는 왠지 이분과 함께 할 앞날이 설렜었다.


초반에는 나는 다소 주눅이 들어있었다. 애초에 그전 부서에서의 부적응을 이유로 병가까지 쓰면서 징징댄 끝에 옮긴 부서였고, 이곳에서도 팀장님한테 계속 갈굼을 받던 터였다.(바로 이 글에 나오는 팀장님으로, 그분은 모두까기 인형이어서 나만 갈군 건 아니었다. 백지보다 오답 내기 https://fishingproductfr.com/@zoey27/92 )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팀장님께 잔소리를 듣다가 팀장님의 과거 업적들을 알게 된 어느 날이었다. 애초에 이 회사 창립멤버로 들어왔을 때 팀장님의 연차가 나보다 낮았다고 한다. 나는 팀장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신지 몰랐었다. 그래서 그룹장님과 점심을 먹다가 얘기했다. “와 그룹장님, 저는 팀장님이 그렇게 이 회사에서 많은 일들을 하신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그렇게 잔소리를 하셨구나 싶어요. 팀장님이 보시기에는 저희가 하는 일이 얼마나 하찮아보였을까요!” 나는 순수하게 감탄의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룹장님이 갑자기 발끈하셨다.


“아니, 하찮다니요! 왜 그런 표현을 써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같은 연차 때의 팀장님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였어요. 그냥 정말 팀장님이 대단하시다는 의미로…!”


“그래도, 스스로를 왜 그렇게 표현해요. 지금 잘하고 있어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잘하고 있다는 그 말도 감사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그게 아마 올해 2월이었다. 그로부터 차례대로 계절을 보내고 다시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에까지, 그룹장님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해주신 말씀은 바로 ‘잘하고 있어요’였다. 그룹장님은 어떤 일을 끝냈을 때 수시로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주기적으로 하는 일대일 면담에서도 내가 해낸 성과들을 말해주셨다. 나에게 가장 필요했지만 내가 나 스스로한테 절대 해주지 않았던 그 말을, 그룹장님은 계속 해주셨다.


11월 초, 고과 평가를 앞두고 면담을 하던 때였다. 그룹장님과 한 해 동안 한 업무와 다음 해 해야 할 업무,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업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이런저런 생각에 대해 그룹장님은 크게 호응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룹장님께 나의 부족한 점과 나의 장점에 대해 여쭤보았다. 그룹장님은 나의 장점은 확실하다고 하셨다. 바로 ‘꼼꼼함’이었다. 내가 이 부서에서 꼼꼼하게 이것저것 잘 챙겨서 든든했다고 하셨다. 그룹장님은 아마 모르셨을 거다. ‘꼼꼼함’, 그게 나의 가장 큰 약점이자 이전 부서에서 나를 괴롭게 만든 요인이었다는 것을. 나는 한평생 덜렁대고 실수 많은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꼼꼼하다고 칭찬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무조건 더블체크를 하고 파일을 정리하는 등의 업무방식은 그룹장님으로부터 배운 거였다. 그룹장님은 아마 그 면담이 나의 가장 큰 단점이 장점이 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모르셨을 거다.


물론 그룹장님도 나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고, 지시사항이 불명확해서 답답할 때도 많았다. 다소 권위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룹장님은 부하직원들의 장점을 봐주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성장하면 좋을지 생각해 주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성장할 수 있다고 믿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그룹장님을 통해 나는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을 봤다. 2025년을 시작하면서 나의 새해 목표는 ‘다시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되기’였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내가 새해 목표를 이루었는지를 돌이켜보았을 때, 나는 내가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최근에는 일하는 게 즐겁게까지 느껴졌다. 작년에 한창 회사 다니는 게 힘들었을 때는 이런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그룹장님이 갑자기 다른 부서로 떠나신다는 말이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번 주 내내 일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번 주에는 그룹장님과 이런저런 회식할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 드렸다. 그러면서 단둘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룹장님 송별회날도 그랬다.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던 그날, 부서를 옮긴 뒤의 앞으로의 업무, 향후 우리 부서의 업무 방향, 조직개편의 내용 등등…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들을 그룹장님은 살짝 귀띔해주셨다. 그룹장님 자리는 함께 일하던 다른 분이 채우시고, 그분의 빈자리는 타 부서에서 전배 오는 분이 채우신다고 했다. 타 부서에서 새로 오시는 분은 또 기존 조직에서 방황하던 분이셨다. 그분이 이 조직에 잘 섞일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그룹장님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사실 저도 그렇고, XX님도 그렇고, 다들 여기에 오기 전에 기존 부서의 업무를 힘들어하던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둘 다 1인분 이상 하려고 열심히 하고 있고. 저는 진짜 여기 와서 열심히 즐겁게 일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다 그룹장님 덕분이에요. 많이 감사했어요. 그룹장님을 보면서 그룹장님의 리더십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룹장님이 계속 계셨으면 새로 오실 그분도 잘 적응하셨을 텐데… 이제 가셔서 너무 아쉬워요…”


밤이기도 하고, 둘 뿐이기도 하고, 마지막날이라는 울컥하는 기분 때문인지 나는 속에 담아두기만 하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내뱉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그룹장님은, 본인이 없어도 조직문화는 그대로일 거라고 다들 잘할 거라고 하셨다. 아예 영영 다른 데 가는 것도 아니고 같은 건물 안에 있으니까 종종 커피나 식사 같이 하자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그룹장님은 차에서 내리셨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당근과 채찍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다. 한 친구가 자기가 석사 시절 교수님이 너무 엄해서 고생한 덕분에 자기가 성장한 것 같다고, 본인은 가르칠 때는 채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룹장님을 떠올렸다. 그룹장님 아래에서 각자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려고 했던 우리 그룹원들을 떠올리며, 적어도 나에게는 당근이 더 맞았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있는 상황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 행복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어떤 환경에서는 일하는 것조차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 그것을 나는 그룹장님께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훗날 마주할 내 후배들에게도 전해줄 것이다.



-2025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