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소음이 가득차기 전 고요하게

햇살아 할머니의 사랑은 어떤걸까

byzeze

아름다운 소음이 일상을 가득 채우기 전, 적막과 고요가 가득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 고요함이 그리워질만큼 아기의 울음소리가 내 일상을 가득 채우겠지만, 그 소리는 분명 아름다울거야. 그렇지만 고요함이 필요할 때는 이 순간을 꺼내먹어야지.


내가 바카라을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엄마 덕분인데, 엄마는 요즘 바카라을 읽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산을 다닌 만큼 도서관도 자주 갔고, 집에는 늘 바카라이 널려있었다. 엄마는 출퇴근 길에 표지를 직접 감싼 바카라을 하나씩 손에 쥐고 지하철을 탔고, 나는 엄마가 읽는 바카라이 멋있어 보여서 엄마가 읽는 바카라을 따라 읽었다. 그 때 읽었던 것이 신경숙의 소설과 냉정과 열정사이,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무엇을 이해하고 읽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엄마가 바카라을 읽는 모습이 좋아서,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 바람 덕분인지 나는 꿈이 바카라방 사장이 되었다. 출산 25일 전 하고 싶은 일이 엄마와 북스테이에 가는 일이었다. 늘 가고 싶어서 저장해두었지만 못갔던 파주의 모티프원.

이번주 월요일 정기검진 결과를 보고 예약하려고 미루다가, 모티프원은 그새 예약이 다 차버렸고 작년에 옆 건물에 새로 오픈한 프레농은 아직 자리가 남아있었다. 이틀 전 프레농 ‘제럴드’ 방을 예약해두곤 파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는 파주였다. 대동리에 있는 ‘동그러니’ 라는 제철 음식점에서 버섯 파스타와 해초 비빔밥을 먹었다. 이상은의 ‘둥글게’ 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동그러니 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 여행을 둥글게 기억하고 싶어졌다.


모티프원이 있는 헤이리마을에 도착했는데 몇 년 전에 왔을 때와 사뭇다르게 유령도시가 되어있었다. 사람도 없고, 날씨도 스산하고, 문 연 가게도 없었다. 추운 동네를 한바퀴 크게 걷다가 숙소로 들어갔다. 아늑한 작은 마을같았다. 모티프원은 22년의 세월을 간직했지만, 프레농은 작년에 오픈해서 조금 더 모던한 느낌이었다. 통창에 하늘과 나무가 잔뜩 담긴, 노란 의자가 있는 방. 아늑하고 포근했다. 엄마는 매트리스가 몸을 폭 감싼다며 잠시 누웠다가 5초만에 코를 그르렁 골며 잠에 들었다. 백수가 과로사할 것 같다며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놀러다니는 엄마는 오늘도 고단했나보다. 추웠던 날씨에 몸을 조금 쉬다가, 벤에 들러 라이브러리0 공용공간으로 갔다. 내가 그토록 궁금했던 공간.


따뜻한 메밀차를 우려 93.1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주황색 조명 옆에 앉았다. 엄마는 이공간을 만든 이인수 작가님의 아내와의 일상 ‘아내의 시선’을 집어들었다. 나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골랐다. 요즘 부쩍 인스타그램을 자주하는 엄마에게 엄마도 바카라 읽어봐! 라고 했더니, 이틀 내내 ‘아내의 시선’을 계속 읽어냈다. 엄마는 알까. 나의 바카라의 뿌리는 엄마라는 걸.


저녁시간이 되어 엄마가 예전에 (그 예전은 20년 전 쯤) 맛있게 먹었다던 ‘반구정’ 장어를 사준다고 했다. 임진각쪽은 처음 와보는 것 같은데, 식당 창 밖으로 철창과 북한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창 밖으로 나갔더니 총소리도 들렸다. 평일의 파주는 어딜가나 사람이 없었고, 장어는 맛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숙소로 돌아왔다. 정말 이렇게 칠흑같은 어둠은 오랜만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메밀차와 레몬그라스 차를 우렸다. 차를 우려 방으로 올라가 샤워를 했다. 엄마는 요즘 산후관리사 자격증 교육을 듣는다. 졸린눈을 하고, 핸드폰을 툭툭 떨어트리면서도 계속 강의를 들었다. 엄마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지만, 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기도 하다. 엄마가 나를 30년 넘게 키웠는데, 이제서야 자유롭게 놀러다니는데, 또 나의 아이를 키우느라 엄마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에게 가장 편하고 든든한 사람이 엄마여서 엄마가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날들. 어렵다 정말.


나는 졸린데도 이 시간이 아까워 스탠드 조명을 끄지 못했다. 계속 바카라을 읽고 읽다가 결국 늦은 시간에 잠에 들었다. 매트리스는 포근했고, 창 밖에선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침 7시쯤 눈을 뜨니 엄마가 벌써 커피를 내려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누우면 5초만에 잠들고, 또 새벽에 알람 없이도 벌떡 일어난다. 나도 일어난김에 차를 우려 집에서 챙겨온 아침을 차렸다. 사과와 고구마와 키위와 당근 주스. 아침을 먹으면서 어제 읽다 만 바카라을 각자 조금씩 더 읽었다. 배부르게 먹으니까 다시 졸려서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 그 동안 엄마는 바카라을 읽었을까.


나갈 시간이 되니 방에 드디어 해가 잔뜩 들어온다. 엄마는 내 사진을, 나와 햇살이 사진을 잔뜩 찍어줬다. 출산 전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하니 이 자유가 더 귀했다. 파주장단콩이 유명하다고 들어 근처 순두부 집에 갔는데 콩이 다 외국산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순두부를 먹고 미메시스 뮤지엄에 갔다. 엄마는 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리 저리 구경하고 사진찍다가 전시는 보고싶지 않다고 하길래 나도 끌리지 않는 전시여서 지혜의 숲으로 갔다. 리파크에서 커피를 마시려했는데 북앤컬쳐 행사를 하는 주간이라 모두 북페어 부스로 가득했다. 처음엔 체력이 넘쳐 모든 부스를 하나하나 다 구경했는데 보다보니 허리도 아프고, 배도 뭉치고 둘 다 지쳤다. 2층 중고서점 보물섬까지 갔다가 너무 피곤해서 근처 까페로 갔다.


빵과 커피를 사서 빵을 뎁히는데, 오븐에 아무리 빵을 뎁혀도 따뜻해지지가 않아 그냥 가지고 왔다. 엄마 왜 직원한테 안물어봐? 라고 하니까? 이런것도 못한다고 할까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 인성에 문제가 있는거야! 라고 했지만, 이런 마음을 갖고있다는 것 자체가 속상했다. 이번 여행은 순전히 내 위주였다. 무거운 걸 들지 못하는 날 위해 엄마가 모든 짐을 들고, 물을 떠다주고, 추울까봐 옷을 벗어주고, 운전을 해주고. 바카라보다는 자연을 좋아하는 엄마가 내가 가고 싶어하는 모든 곳을 다 같이 가주고. 지나고 보니 미안했다. 출산 전 마지막 여행인데 너무 내 위주였나. 너무 예민하고 공주처럼 굴었나 싶었다. 사진을 보다보니 엄마가 부쩍 야위어보이는 건 기분탓인가. 나는 2박 3일동안 엄마집에서 차려주는 밥 먹고, 눕고, 자고, 여행가서도 눕고, 자고, 편하게만 다녔는데 엄마는 피곤했을 걸 생각하니까 미안해진다.


호르몬때문인가 눈물이 난다. 엄마가 10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랑 유럽여행도 가고 싶고, 햇살이랑 셋이 백패킹도 가고 싶고 엄마 밥도 한참 더 먹고싶다. 나도 엄마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요즘 밥을 잘 못먹어서 한 달 동안 몸무게가 그대로였는데 엄마랑 지내며 먹고 자고, 편히 쉬니까 2박 3일만에 2.5kg가 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