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도 쉽게 누를 수 있어야 한다

D-27 │ 슬롯적 가치 디자인까지 27일

by컬러코드

휴대전화에 새로운 앱을 설치했습니다.

앱을 열자 화면이 나타납니다.

“알림을 허용하시겠습니까?”

‘허용’ 버튼은 크고 눈에 잘 띕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작게 적혀 있습니다.

다음 화면에서는 회원가입을 권합니다.

그다음에는 위치정보를 요청하고,

이벤트 메시지를 받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왜 ‘예’라고 하는 길은 쉬운데 ‘아니요’라고 하는 길은 어려울까요?


우리는 디자인을 사람의 선택을 돕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택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할까요?

A와 B 중 하나를 고르는 것만 선택일까요?

저는 여기에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할 때

직원이 묻습니다.

“적립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이 대화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서비스에서는 이상하게

거절하기 위해 더 많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광고 수신에 동의하는 것은 한 번이면 되는데,

해지하려면 여러 메뉴를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가입은 몇 분이면 되는데

탈퇴 버튼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렵습니다.

무료 체험은 쉽게 시작되지만

자동결제를 중단하는 방법은 복잡하기도 합니다.


이런 순간 디자인은 단순한 화면 구성이 아닙니다.

사람의 결정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힘이 됩니다.


물론 기업은 고객이 가입하기를 원합니다.

앱을 계속 사용하기를 원하고,

알림을 허용하고,

제품을 구매하기를 바랍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필요한 과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설득하는 것과 선택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좋은 제품이라면

“이것을 선택하면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용자가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원하지 않는다면 선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길까지 열어 두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거절할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슬롯적 가치 디자인에서는 꽤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원하는 방향의 버튼만 크게 만들어 놓았다면

그것을 온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공서비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시민이 디지털 서비스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앱보다 전화가 편하고,

어떤 사람은 온라인 신청보다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 합니다.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하나의 방식만 남겨 놓는다면

서비스는 편리해질 수 있지만

누군가의 선택권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 전환에서도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것을 온라인으로 바꿀 것인가?”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원하는 사람에게 어떤 길을 남겨 둘 것인가?”입니다.


공간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전시는 관람객에게 계속 참여를 요구합니다.

사진을 찍고,

화면을 누르고,

QR코드를 읽고,

체험에 참여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냥 바라보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참여할 권리가 있다면 참여하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디자인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사용자를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만 좋은 경험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회원이 되지 않아도 둘러볼 수 있고,

개인정보를 주지 않아도 기본적인 정보를 볼 수 있으며,

후기를 쓰지 않아도 서비스를 끝낼 수 있고,

알림을 받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것.

사용자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디자인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서비스의 기준으로

전환율을 이야기합니다.

몇 명이 가입했는가,

몇 명이 구매했는가,

몇 명이 클릭했는가.

중요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슬롯적 가치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숫자도 궁금해집니다.

거절하려던 사람이 얼마나 쉽게 거절할 수 있었는가.

해지하려던 사람이 얼마나 쉽게 떠날 수 있었는가.

동의하지 않은 사람도 불이익 없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는가.


어쩌면 좋은 디자인의 품격은

사람이 들어올 때보다 떠날 때 더 잘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가입할 때는 친절했는데

탈퇴하려는 순간 복잡해지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구매할 때는 버튼 하나면 되었는데

환불하려면 여러 단계가 필요한 서비스도 있습니다.

그 순간 사용자는 깨닫습니다.

이 서비스가 나를 존중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의 선택만 원했던 것인지.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좋은 관계에서는

“싫어요.”

“오늘은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했다고 관계가 불편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거절하기 어려운 관계에서는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진짜 선택은 ‘아니요’라고 말해도 괜찮을 때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에서

YES 버튼만큼 NO 버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만큼 비동의가,

가입만큼 탈퇴가,

시작만큼 중단이,

참여만큼 비참여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사람이 언제든 자신의 결정을 바꿀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개인의 취향과 행동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우리를 설득하는 디자인도 훨씬 정교해질 것입니다.

내가 어떤 문구에 반응하는지,

언제 구매할 가능성이 높은지,

어떤 화면에서 오래 머무는지까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디자인에는 더 큰 바카라임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는가보다
사람의 선택을 얼마나 존중할 수 있는가.


다음에 앱이나 웹사이트에서

‘동의합니다’ 버튼을 만나면

반대편도 한번 찾아보세요.

‘동의하지 않습니다.’

‘건너뛰기.’

‘나중에.’

‘괜찮습니다.’

그 버튼은 잘 보이나요?

쉽게 누를 수 있나요?

그 작은 버튼의 크기와 위치가

그 서비스가 사용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사람에게

“이것을 선택하세요.”

라고 영리하게 설득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택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때 선택은 비로소

사용자의 것이 됩니다.



[오늘의 깨달음]

선택권이 있다는 것은 여러 개의 버튼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니요’라고 선택해도 불편하거나 불리하지 않은 상태가 진짜 선택권입니다.



[오늘의 사유]

오늘 사용하는 앱 하나를 열어보세요.

가입,

알림,

광고,

개인정보,

구독.

‘동의’하는 방법과 ‘거절’하는 방법은 똑같이 쉬운가요?

YES와 NO가 정말 같은 무게로 디자인되어 있나요?



[함께 사유해 볼 질문]

우리는 사람의 선택을 돕는 디자인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선택을 하도록 사람을 밀고 있나요?

사용자가 언제든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남겨 두고 있나요?



English Summary

“No” Should Be Easy to Choose Too

A choice is not truly free when saying yes is easy but saying no is deliberately difficult.

Ethical design should make consent, refusal, participation, withdrawal, joining, and leaving understandable and accessible.

Good design can persuade, but it should not trap.

Real choice exists when people can comfortably say no.


Keywords

Ethical Design
Right to Refuse
User Autonomy
Consent
Choice Architecture
Design Responsibility
Social Value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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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디자인은 변화에서 완성된다.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변화시켰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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