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3 │ 슬롯적 가치 디자인까지 33일
공중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세면대 주변에 물이 흥건합니다.
휴지는 바닥에 떨어져 있고,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생각합니다.
“조금만 다음 사람을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반대로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을 만나면 어떨까요?
나 역시 이상하게 조심해서 사용하게 됩니다.
다음 사람에게도 이 상태를 남겨 주고 싶어집니다.
공간이 사람의 태도를 바꾸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주로 현재의 사용자를 생각합니다.
지금 이 의자에 앉는 사람,
지금 이 서비스를 신청하는 사람,
지금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
그래서 묻습니다.
편리한가?
안전한가?
이해하기 쉬운가?
모두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더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사용하고 난 뒤의 사람은 어떨까?”
우리의 일상에는 혼자 사용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이어서 사용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도서관의 바카라,
공원의 벤치,
공중화장실,
공유자전거,
회의실,
주차장,
아파트의 공용공간.
내가 떠난 자리에 곧 다른 사람이 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다음 사람의 경험이 됩니다.
도서관 바카라 한 권을 생각해 봅니다.
바카라장을 접어 표시하거나,
음료를 흘리거나,
필요한 부분에 마음대로 밑줄을 긋는다면
그 흔적은 다음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반대로 깨끗하게 사용해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다음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편안하게 바카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공유한다는 것은 물건만 함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이어받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개인의 예절 문제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시민의식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사람에게 계속
“깨끗하게 사용하세요.”
“제자리에 놓으세요.”
“다음 사람을 배려하세요.”
라고 말하기 전에 묻습니다.
“배려하기 쉽게 만들어져 있는가?”
공유자전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반납 장소가 명확하고,
자전거를 제대로 세우면 반납이 완료되며,
다음 사람이 어디에서 이용할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면
사용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이용을 준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애매하고,
반납 여부도 알기 어렵다면
아무 곳에나 세워 두는 행동이 생길 수 있습니다.
좋은 시스템은 사람의 선의만 기대하지 않습니다.
좋은 행동이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듭니다.
공공공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레기를 버릴 곳이 적절하게 있고,
사용한 물건을 돌려놓을 위치가 분명하고,
공간의 사용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다음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이 직접
“배려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아도
배려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슬롯적 가치 디자인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슬롯적 가치는 거창한 봉사나 기부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용한 것을 다음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남겨 두는 것,
공공의 것을 조금 아껴 사용하는 것,
나에게 편리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만들지는 않는지 생각하는 것.
이런 작은 행동이 반복될 때 공동체의 경험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사람’은 대부분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며,
만날 가능성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 주고,
자리를 정리하고,
바카라을 깨끗하게 사용합니다.
어쩌면 공동체란
서로 아는 사람끼리만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만난 적 없는 사람의 불편까지 조금 생각할 수 있는 관계인지도 모릅니다.
도시 역시 수많은 ‘다음 사람’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공원을 사용하는 사람 다음에
내일 다른 사람이 옵니다.
지금 어린이가 사용하는 놀이터를
몇 년 뒤 또 다른 어린이가 사용합니다.
우리가 오늘 사용하는 자연과 자원 역시
다음 세대가 이어받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다음 사람을 생각하는 디자인’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생각하는 디자인으로 확장됩니다.
제품 하나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하고 버리는 순간까지만 생각할 것인지,
버려진 뒤 어디로 가는지까지 생각할 것인지.
공간을 만들 때도
준공식 날의 모습만 생각할 것인지,
5년, 10년 뒤 사용하는 사람까지 생각할 것인지.
정바카라을 만들 때도
지금의 성과만 볼 것인지,
그 결정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남길지까지 볼 것인지.
디자인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습니다.
문득 사람의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오늘 하는 작은 선택 가운데
당장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다음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정리해 둔 자료 덕분에 다음 사람이 일을 쉽게 시작하고,
누군가 심어 둔 나무 덕분에 몇십 년 뒤 사람들이 그늘에서 쉽니다.
그 일을 한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남겨 둡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
저는 이것이 디자인의 아름다운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을 상상하는 것.
내가 떠난 뒤 이 공간을 사용할 사람,
이 제품을 사용할 사람,
이 도시에서 살아갈 사람을 생각하는 것.
디자인은 현재의 사용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와 다음 사람 사이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공공공간을 이용하고 자리를 떠날 때
잠시 뒤를 한번 바라보세요.
그리고 아주 작은 질문 하나를 던져보면 좋겠습니다.
“다음 사람은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그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배려는 개인의 마음을 넘어 디자인의 가치가 됩니다.
[오늘의 깨달음]
좋은 디자인은 지금 사용하는 사람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아직 만나지 않은 다음 사람의 경험까지 생각합니다.
[오늘의 사유]
오늘 내가 사용하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은 무엇이 있었나요?
회의실의 의자,
공용 화장실,
주차 공간,
도서관의 바카라,
혹은 온라인에 남긴 정보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음 사람에게 어떤 상태로 그것을 건네고 있을까요?
[함께 사유해 볼 질문]
우리가 만드는 제품과 공간, 서비스는
지금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편리하도록 만들어져 있나요?
아니면 그 사람이 떠난 뒤 찾아올 다음 사람의 경험까지 이어지도록 디자인되어 있나요?
English Summary
Designing for the Next Person
Many things in our daily lives are shared across time. A public space, a library book, a shared bicycle, or even a natural resource passes from one person to another.
Good design does not rely only on individual goodwill. It creates systems that make consideration for others easier and more natural.
Designing for society means thinking not only about the current user, but also about the person who comes next.
Keywords
Shared Experience
Design for Others
Civic Design
Commons
Future Users
Social Responsi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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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디자인은 변화에서 완성된다.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변화시켰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