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지막 인사 (완결)
나는 인사기록카드를 다시 들여다봤다.
016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숫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 내가 1999년에 사용했던 번호였다.
바카라상 위에는 오래된 사진도 놓여 있었다. 입사하던 해에 찍은 사진이다. 촌스러운 양복에 넥타이를 바짝 조이고 있는 스물넷의 한정우.
어제 처음 만난 신입사원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였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얼굴이 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화번호까지 같다는 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생년월일은 2002년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서류를 덮었다.
마침 정우가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어찌나 우렁찬지 옆자리 직원까지 고개를 들었다.
"정우 씨, 군대 다시 갔어요?"
"아닙니다!"
"목소리 좀 낮춰요. 나 아직 잘 들려요."
직원들이 웃었다. 정우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사진을 서랍에 넣었다.
오전에는 행사 매대에 붙일 가격표를 확인했다.
신입사원 정우가 작업을 맡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왔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왜요?"
"가격표를 잘못 붙였습니다."
"얼마나?"
"한 매대 전부요."
"허허, 크게도 붙였네요."
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그래요. 아직 판매된 건 없어요?"
"네. 그건 확인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가봅시다."
매대에 가보니 가격표 두 종류가 뒤섞여 있었다. 나도 몇 장을 떼어내며 정우에게 새 가격표를 건넸다.
"팀장님, 제가 혼자 하겠습니다."
"같이하면 빨리 끝나잖아요."
"이런 것도 직접 하십니까?"
"그동안 내가 잘못 붙인 가격표만 몇 개인데요."
정우가 웃었다.
"팀장님도 그렇게 실수하셨습니까?"
"그럼요. 처음부터 잘하면 그건 신입사원이 아니죠."
녀석은 소리 내어 웃더니 다시 가격표를 붙였다.
"정우 씨."
"네."
"다음에는 혼자 끙끙대지 말고 바로 얘기해요. 잘못된 건 같이 고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뒤 정우가 물었다.
"팀장님은 27년 동안 회사 다니시면서 진작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 없으셨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그럼 오래 버티셨나 봅니다."
나는 가격표 한 장을 떼어냈다.
"그러게요. 오래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대단하십니다."
"뭐가 대단해요. 정우 씨도 내 나이 돼봐요."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때는 저도 팀장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죠. 아마 나보다 더 잘할 수도 있고."
"저도 팀장님처럼 좋은 상사가 되고 싶습니다."
"분명 그리 될 거예요."
며칠 후
총무팀 박 과장이 인사서류를 가지고 찾아왔다.
"팀장님, 정리할 게 몇 가지 남았습니다."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박 과장, 그런데 신입사원 연락처 확인했어요?"
"무슨 연락처요?"
"016 번호요. 지금 쓰는 번호가 아닌 것 같은데."
박 과장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 그거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이 친구가 좀 이상해요. 옛날 물건도 가지고 다니고, 말투도 그렇고."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참 묘하단 말이에요."
박 과장이 웃었다.
"팀장님도 많이 신경 쓰이시나 봅니다."
"아무래도 이름까지 같으니까요."
박 과장은 서류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마지막이시죠?"
"네."
"27년 동안 고생 많으셨고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이제 회사 걱정은 그만하시고 편하게 지내세요."
평소와 다른 말투에 나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마지막 출근 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정리했다.
사무실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화가 울리고, 누군가는 서류를 찾느라 바빴다.
내가 없더라도 회사는 잘 돌아갈 것이다.
짐을 챙기는데 정우가 다가왔다.
"팀장님, 오늘이 마지막이십니까?"
"네. 이제 정우 씨가 잘해야죠."
"많이 배우지도 못했는데 아쉽습니다."
"앞으로 배울 날이 더 많잖아요."
정우가 손을 내밀었다.
"팀장님, 감사했습니다."
나는 잠깐 웃었다.
"나중에 팀장 되면 신입사원들 너무 혼내지 말아요."
"네. 꼭 기억하겠습니다."
녀석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상하게 쉽게 놓지 않았다.
"정우 씨?"
"아, 죄송합니다."
손을 놓은 정우가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차분한 목소리였다.
"정우 씨도 잘 지내요."
나는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둘러본 뒤 문을 나섰다.
한정우 팀장이 떠난 뒤에도 신입사원 정우는 한동안 빈 바카라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박 과장이 다가왔다.
"그냥요. 기분이 좀 이상해서요."
"만나보니 어떻던가?"
"생각보다 괜찮은 팀장이더군요."
"누구처럼 가격표 잘못 붙였다고 뭐라고 하진 않지?"
정우가 웃었다.
"그래도 팀장님 덕분에 제가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나 봐요."
박 과장이 정우의 가방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그 전화기는 왜 가져왔어?"
"아, 그거요?"
정우가 가방에서 낡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래전에 쓰던 거라 그냥 챙겼습니다."
"생년월일은 고쳐 쓰면서 전화번호는 그대로 적어놓고. 하마터면 들통날 뻔했잖아."
"설마 그 번호를 아직 기억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진까지 꺼내 봤다더군."
"아직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러게. 자네 참 별 걸 다 간직하고 살았어."
정우가 휴대전화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팀장님."
"왜?"
"오랜만에 신입사원으로 살아보니까 좋았습니다."
"그 나이 먹고도?"
"네. 그때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길었는데, 다시 가보니 금방 지나가더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어리숙한 건 똑같고."
"그 말씀도 참 오랜만에 듣습니다."
2053년.
병실에는 의료기기 소리만 일정하게 울리고 있었다.
한정우의 손을 잡고 있던 아내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맡에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침대 발치에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정우야."
한정우가 눈을 떴다.
"팀장님."
이번에는 박 과장의 얼굴이 아니었다. 1999년,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나를 가르쳤던 강태우 팀장이었다.
"어땠어? 27년 전으로 한번 다녀오니까."
"재미있었습니다. 제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자네가 자넬 못 알아보더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사진까지 들여다보고도."
강 팀장이 웃었다.
"그래서, 만나보니 어떻던가?"
"괜찮은 사람이었더군요. 고집이 좀 세긴 했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한정우도 웃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저는 퇴직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27년이나 다녔으니 회사가 제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거든요."
"그랬지."
"그런데 다른 세상이 또 펼쳐지더군요. 회사 다닐 때는 못 해봤던 일도 하고, 가족들하고 여행도 다니고요. 그렇게 또 27년을 더 살았습니다."
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동안 잘 살아왔어. 나도 가족들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그게 가장 후회돼."
한정우는 침대 곁에서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내를 바라봤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더 소중하게 쓰고 싶습니다."
"그래야지."
한정우가 강 팀장을 돌아봤다.
"그래서, 팀장님."
"왜?"
"아직 따라가기는 싫습니다."
강 팀장이 껄껄 웃었다.
"누가 지금 따라오래?"
"예전에는 팀장님이 부르시면 무조건 달려갔으니까요."
"이 녀석아, 자네가 아직도 내 부하 직원이야?"
"그럼 오늘은 지시 불이행 해도 징계하지 마십시오."
"허허, 이 녀석. 나이 팔십이 다되어 가니 이제야 말대꾸를 좀 하네."
"그럼 27년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27년 동안 이어온 온라인 게임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퇴직이라는 말은 아득히 먼 미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은 어느새 제 앞에 와 있었고, 익숙했던 일상과 정든 사람들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온 자리를 내려놓으려니 홀가분함보다 아쉬움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들, 미처 다 전하지 못한 고마움과 작별의 마음이 가슴에 오래 남았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운 순간도 많았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마음에서 시작됐습니다.
만약 27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그때의 나에게 조금 덜 서두르고, 더 많이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에도 귀 기울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퇴직 후 27년을 더 살아온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건넬까. 지금의 불안과 아쉬움도 언젠가는 새로운 삶을 여는 소중한 문턱이었다고, 아직 우리에게는 살아갈 날과 다시 시작할 기회가 남아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온라인 게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가족보다 일을 먼저 생각했고, 정작 자신을 위한 시간은 뒤로 미루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바카라임을 다하는 동안, 우리의 청춘과 계절은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퇴직한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직함을 내려놓아도 우리가 살아온 날들의 의미와 배움, 사람들과 나눈 인연은 고스란히 남습니다. 이제는 누군가의 상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끄는 사람이 되어, 미처 해보지 못한 일들과 오래 마음에 품어온 꿈을 다시 마주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나누고, 잊고 지냈던 자신의 마음을 돌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의 상사가 되었다》를 통해 오랜 온라인 게임생활을 마무리하는 분들께 작은 위로와 진심 어린 응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떠나는 자리에서 느끼는 허전함과 눈물, 앞으로의 삶을 향한 두려움까지도 모두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그 끝에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새로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퇴직은 온라인 게임생활의 마지막 날이지, 인생의 마지막 날은 아니니까요.
혹시라도 저와 같은 결단을 내리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지나온 시간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남은 삶을 자신을 위해 천천히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오늘이 어쩌면 가장 설레는 출발점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