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즈를 공부하다 보면 기술적 모순에서 물리적 모순으로 넘어가는 설명을 자주 접하게 된다.
보통은 아주 간단하게 물리적 모순을 도출한다.
어떤 조건을 선택하면 한쪽은 좋아지고 다른 한쪽은 나빠진다.
그래서 결국 하나의 특성이 “커야 하면서 작아야 한다”, “빨라야 하면서 느려야 한다” 같은 형태로 정리된다.
이 방식은 분명 강력하다.
문제를 빠르게 압축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문제를 다루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빨리 줄여버린 건 아닐까?”
문제를 충분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하나의 파라미터로 곧장 정리해 버리면 그 안에 숨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놓친 특성들은 사실 새로운 물리적 모순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해결 방향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럴 때 기술적 모순의 양쪽 목적을 각각 만족시키는 방법을 먼저 넓게 적어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특성을 찾아본다.
그렇게 하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문제 구조가 드러나고 하나의 기술적 모순에서 여러 개의 물리적 모순을 만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과정을 알람시계와 우산 사례로 풀어보려 한다.
먼저 알람시계를 생각해 보자.
기술적 모순
알람시계를 가까이 놓으면 알람 소리를 크게 들을 수 있지만 무의식 중에 쉽게 꺼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알람시계를 멀리 놓으면 무의식 중에 쉽게 끄지는 못하지만 알람 소리를 크게 듣기 어렵다.
보통 여기서 바로
“알람시계와의 거리는 가까워야 하면서 멀어야 한다”
라고 정의하고 싶어진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한 번만 더 생각을 늦추면, 문제는 훨씬 더 풍부해진다.
먼저, 알람 소리를 크게 듣기 위한 방법을 적어보자
이 단계에서는 아직 반대 목적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소리를 크게 듣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만 적는다.
거리는 가까워야 한다
스피커 용량은 커야 한다
스피커는 많을수록 좋다
스피커 방향은 사람 쪽이어야 한다
시계는 클수록 좋다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 보자.
쉽게 끄지 못하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번에는 앞의 아이디어는 잠시 잊고, 오직 “쉽게 끄지 못하게 하는 방법”만 적어본다.
장애물이 있으면 쉽게 못 끈다
시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시계는 작을수록 좋다
시계는 멀리 있어야 한다
끄는 방법은 복잡해야 한다
끄는 버튼은 많아야 한다
한 번에 꺼지지 않아야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거리만 보였는데, 이제는 장애물, 시계 크기 같은 특성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두 목록을 비교해 보면 공통으로 걸리는 특성이 보인다.
거리
장애물
시계 크기
처음에는 거리 하나만 보였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두 개가 더 드러난 것이다.
이제 이 특성들 각각에 대해 물리적 모순을 쓸 수 있다.
물리적 모순
알람 소리를 크게 듣기 위해서는 거리는 가까워야 하고, 쉽게 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리는 멀어야 한다.
알람 소리를 크게 듣기 위해서는 장애물은 없어야 하고, 쉽게 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장애물은 있어야 한다.
알람 소리를 크게 듣기 위해서는 시계는 커야 하고, 쉽게 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계는 작아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IFR도 쓸 수 있다.
시계와의 거리는 가까우면서 멀어야 한다
장애물은 있으면서 없어야 한다
시계 크기는 크면서 작아야 한다
즉, 하나의 기술적 모순에서 하나의 물리적 모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물리적 모순과 IFR이 도출될 수 있다.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문제의 얼굴이 하나씩 드러나는 셈이다.
이번에는 우산을 보자.
기술적 모순
비를 충분히 막기 위해서는 우산이 커야 하지만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려면 우산은 작아야 한다.
이 문제 역시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보통 바로 이렇게 정리해 버린다.
“우산은 커야 하면서 작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번만 더 넓게 펼쳐보자.
비를 잘 막기 위한 방법
이번에도 먼저 한쪽 목적만 생각한다.
비를 잘 막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산 직경은 커야 한다
우산 깊이는 깊어야 한다
살대 길이는 길어야 한다
살대 개수는 많아야 한다
원단 면적은 넓어야 한다
사람과 우산 사이의 틈은 적어야 한다
방수성은 좋아야 한다
형상은 몸을 더 잘 감싸야한다
이제 반대로 가보자.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는 방법
우산 직경은 작아야 한다
우산 깊이는 얕아야 한다
살대 길이는 짧아야 한다
살대 개수는 적어야 한다
원단 면적은 작아야 한다
접었을 때 길이는 짧아야 한다
접었을 때 두께는 얇아야 한다
구조는 단순해야 한다
무게는 가벼워야 한다
살대 분절수는 많아야 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큰 우산 vs 작은 우산”처럼 보였던 문제가, 이제는 훨씬 더 다양한 특성으로 분해된다.
공통 파라미터를 찾아보면 두 목록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특성은 다음과 같다.
우산 직경
우산 깊이
살대 길이
살대 개수
원단 면적
살대 분절수
처음 기술적 모순에서는 그냥 “크기” 정도로 보였지만, 조금 더 펼쳐보니 실제로는 여러 개의 파라미터가 얽혀 있었던 것이다.
물리적 모순
이제 각 특성별로 물리적 모순을 쓸 수 있다.
비를 잘 막기 위해서는 우산 직경은 커야 하고,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려면 우산 직경은 작아야 한다.
비를 잘 막기 위해서는 우산 깊이는 깊어야 하고,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려면 우산 깊이는 얕아야 한다.
비를 잘 막기 위해서는 살대 길이는 길어야 하고,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려면 살대 길이는 짧아야 한다.
비를 잘 막기 위해서는 살대 개수는 많아야 하고,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려면 살대 개수는 적어야 한다.
휴대와 보관을 쉽게 하려면 살대 분절수는 많아야 하고, 안정적 구조를 원하면 살대 분절수는 적어야 한다.
그리고 IFR은 이렇게 쓸 수 있다.
우산 직경은 크면서 작아야 한다
우산 깊이는 깊으면서 얕아야 한다
살대 길이는 길면서 짧아야 한다
살대 개수는 많으면서 적어야 한다
살대 분절수는 많으면서 적어야 한다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할까
이 방식의 핵심은 기술적 모순을 곧바로 하나의 물리적 모순으로 줄이지 않는 데 있다.
대신
한쪽 목적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많이 적고
반대 목적을 만족시키는 방법도 많이 적고
그 안에서 공통 특성을 찾고
그 특성마다 물리적 모순과 IFR을 만든다
이렇게 하면 문제의 구조가 훨씬 더 풍부하게 드러난다.
처음에는 하나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니 사실은 여러 개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해결 방향도 더 많아진다.
거리만 보이면 거리만 바꾸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장애물과 크기까지 보이면 전혀 다른 해결안이 가능해진다.
크기만 보이면 접는 구조만 떠올리지만, 깊이, 살대 길이, 분절수까지 보이면 완전히 다른 설계 방향이 열린다.
즉, 문제를 더 많이 본다는 것은 아이디어를 더 많이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를 잘 푼다는 것
트리즈는 종종 “정답을 찾는 이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트리즈는 먼저 문제를 더 잘 보게 만드는 이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람시계 사례에서는 처음에 거리 하나만 보였지만, 장애물과 시계 크기가 추가로 드러났다.
우산 사례에서는 처음에 단순히 크기만 보였지만, 직경, 깊이, 살대 길이, 살대 개수, 분절수라는 훨씬 더 풍부한 구조가 나타났다.
문제를 깊게 본다는 것은 정답을 빨리 찾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이루는 특성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술적 모순에서 물리적 모순으로 갈 때 가끔은 서두르지 않는 편이 더 좋다.
조금 더 적어보고, 조금 더 비교해 보고, 조금 더 찾아보면 문제는 우리가 처음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