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일까

우리는 원래 반짝거리는 존재다.

by한유신

지난 글에서 사람은 누구나 반짝이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사람 전체를 한 번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잠깐 반짝이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다이아몬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깨진 유리병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비싸냐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것이 가장 반짝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글을 쓰고 나서 반짝이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반짝이는 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반짝인다, 빛난다, 눈에 띈다와 같은 말들은 대체로 좋은 말처럼 들린다.

사람에게 “당신은 반짝인다”라고 말하면 칭찬처럼 들리고, “빛나는 사람”이라고 하면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반짝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칼날도 반짝이고 깨진 유리도 반짝인다.

물 위에 떠 있는 기름도 햇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유용한 것도 아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까마귀다.

우리 집 옥상에서 굴껍데기를 물고 갔다.


그렇다면 반짝임은 무엇일까.

반짝임은 계속 환한 것이 아니다.

계속 밝으면 그것은 반짝임이 아니다.

반짝인다는 것은 환했다가 어두웠다가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짝임 안에는 이미 어두움이 포함되어 있다.


구급차나 경찰차의 사이렌 불빛은 계속 켜져 있지 않고 깜빡인다.

계속 켜져 있으면 오히려 주변의 다른 빛과 섞여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 사람의 눈은 그 변화를 알아차린다.

반짝임은 밝기 때문만이 아니라 변화 때문에 보인다.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항상 밝게 사는 것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밝기만 하면 오히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계속 환하면 그것은 반짝임이 아니라 배경이 된다.

밝음과 어두움이 반복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반짝임이라고 부른다.


지금 어둡다는 것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반짝거리기 위해 지나가는 시간일 수 있다.

어두운 시간을 견디고 지나가야 다시 밝아지는 순간이 선명해진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반짝인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별 자체가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별은 멀리서 계속 빛나고 있다.

다만 그 빛이 지구의 흔들리는 대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눈에는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별은 낮에도 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태양빛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밤이 되고, 주변이 어두워져야 우리는 별을 볼 수 있다.


반짝임은 그 자체의 성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주변 상황이 필요하다. 어두움이 필요하고, 거리도 필요하고, 기다림도 필요하다.


미라(Mira)라는 항성이 있다.

미라는 대략 332일을 주기로 밝기가 변하는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변광성이다.

밝을 때는 맨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두워지면 보기 어려워진다.

어느 날 미라를 보고 “저 별은 반짝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틀릴 수 있다.

별이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별의 어두운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반짝임이 드러날 조건을 만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어두운 구간을 지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너무 빨리 포기해서 그 사람의 반짝이는 순간을 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빨리 판단한다.

지금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 빛나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반짝이는 별이 있다면, 그 별을 하루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반짝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반짝임을 기다리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반짝임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별이 있어도 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이렌 불빛도 한낮의 강한 햇빛 아래에서는 덜 선명할 수 있다.

반짝임은 빛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빛을 드러나게 하는 환경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의 반짝임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환경에서는 끝까지 빛나지 못한다.

너무 밝은 곳에서는 묻히고, 너무 시끄러운 곳에서는 들리지 않고, 너무 빠른 곳에서는 기다려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반짝임을 볼 수 없는 환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이 얼마나 밝은지만 보면 안 된다.

지금 이 사람이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이 사람의 반짝임이 드러날 환경인지, 내가 너무 빨리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봐야 한다.


물론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다.

주변이 어두워져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밤만 기다릴 수는 없다.

때로는 내가 주변보다 조금 더 밝아져야 할 때도 있다.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빛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너무 밝아지려고 애쓰다 보면, 나도 지치고 다른 사람의 별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계속 밝게 사는 것이 아니다.

밝아질 때와 어두워질 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짝임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반짝임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서 아직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다.

계속 밝지 않아도 되고 계속 밝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반짝거리고 살아야 한다.

밝아질 때가 있고, 어두워질 때가 있어야 한다.

켜질 때가 있고, 꺼질 때가 있어야 다시 켜지는 순간이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어둡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빛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반짝임은 원래 그렇지 않다.

반짝임은 계속 환한 것이 아니라, 환했다가 어두웠다가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두운 시간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다시 밝아지기 위한 시간이다.


별도 그렇다.

사람도 그렇다.

지금 어둡다고 해서 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은 다시 반짝이기 직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원래 반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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