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미워하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주인공 황동만은 시끄럽고, 뾰족하고, 친구 박경세의 다섯 번째 영화 '팔 없는 둘째 누나' 시사 뒤풀이에서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입니다. 보고 있으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습니다. 한마디로 비호감, 정이 안 가는 인물입니다.
짜증 나고 미워하려고 했는데 다른 감정이 자꾸 끼어들었습니다. 짠하고, 안쓰럽고, 가끔은 역겹고, 또 가끔은 들킨 것 같았습니다.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황동만 같은 사람을 한 번쯤 봤을 것입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모임에서, 가족 안에서. 같이 있으면 피곤하고,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데 그를 피하면 피할수록 묘하게 잊히지 않는 사람. 황동만이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말들이 어느새 화면 밖의 나에게 던져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이 드라마는 더 이상 황동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황동만이라는 사람
황동만은 영화 동아리 선후배로 뭉친 '8인회' 멤버입니다. 멤버들 중 유일하게 데뷔하지 못한 사람이고, 20년째 시나리오를 쓰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날씨를 알려드립니다'은 공모전 최종심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형 황진만의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 다른 멤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그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끄럽습니다. 박경세의 영화 시사 뒤풀이에서 작품의 결함을 큰소리로 짚어대고, 동료가 잘 됐다는 소식에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자기 시나리오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리트머스지 같은 남자야. 상대가 산성이면 나도 산성, 상대가 알칼리면 나도 알칼리.”
타인의 태도에 따라 자신의 색이 바뀌는 사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 앞에서는 가시를 세우고, 진심으로 봐주는 한 사람 앞에서는 무장을 푸는 인물. 그의 모든 뾰족함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였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30억 제작지원금 최종 심사에서 탈락한 그에게 최필름 대표 최동현이 잔인한 충고를 건넵니다. 이제는 안 되는 일을 붙들지 말고 그만하라고. 그러자 동만이 받아칩니다.
“내 인생이 왜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
이 한 마디에 그의 20년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버릇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속으로만 삼키던 말이기도 합니다. 왜 내 삶이 남의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지, 왜 나의 속도와 모양이 타인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지, 왜 늦었다는 이유로 곧바로 실패한 사람으로 판정받아야 하는지. 황동만은 그 질문을 예쁘게 정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날것으로 들립니다.
그가 가장 격렬하게 부딪치는 인물은 박경세입니다. 같은 8인회 멤버이자 한때 가장 가까운 친구. 그러나 박경세는 데뷔했고 동만은 못 했습니다. 이 균열은 단순한 성공의 차이가 아닙니다. 박경세의 데뷔작 모티브가 사실 황동만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황동만은 모르고, 박경세만 아는 비밀. 그 비밀의 무게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대화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동만이 시끄러운 이유, 박경세가 동만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 둘 다 거기에 있습니다. 빼앗긴 사람과 빼앗은 사람의 비대칭이 20년간 두 사람을 묶어두고 있는 셈입니다. 박경세는 그 사실을 들키까봐 전전긍긍해합니다.
황동만의 문제는 감정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서툴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아픈 마음을 말로 덮습니다. 조용히 있으면 사라질 것 같아서 떠듭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밀려오면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 서툰 방식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기 시작하면, 그를 향한 시선이 조금씩 바뀝니다.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 앞에서 그가 한 선언이 있습니다.
“내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 나의 빛나는 스토리를 기대해라. 어디 한번 막아봐라, 막아지나.”
문장은 우스꽝스럽고, 어쩌면 허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허세가 그를 20년 동안 버티게 해온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알면, 쉽게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무가치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건져 올리겠다는 의지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거는 마지막 주문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저건 바로 저였습니다
친구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한 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 “운이 좋았겠지” 하고 잠깐 깎아내린 적은 없었습니까? 동료의 발표를 들으며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까? 친구의 바카라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일주일쯤 그 친구를 피하고 싶었던 적은요? 모임에서 누군가 잘 나가는 이야기를 길게 할 때, 그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었던 적은요?
누군가 SNS에 행복한 사진을 올렸을 때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가라앉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후배가 좋은 회사에 합격했다는 답장을 진심으로 보내면서도, 그날 저녁 평소보다 많이 먹었던 그날이 있었습니다. 동기 모임에서 누군가의 자녀 자랑이 시작되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일어서던 그 잠깐의 도피가 있었습니다.
이 감정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꺼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어딘가에 누적됩니다. 황동만은 그 누적된 것을 매번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입니다. 슬롯생활에 실패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검열 시스템이 고장 난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고 있으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가? 저렇게 살면 안 되는 건가? 저렇게 살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황동만은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차이가 인격의 차이인지, 슬롯적 학습의 차이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황동만보다 더 큰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정확히 보여주고, 우리는 자신을 숨기고 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8인회의 다른 멤버들도 한때는 황동만과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술자리에서 동료들을 깎아내리던 사람들. 다만 그들은 데뷔했고, 자리를 잡았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황동만이 그렇게나 불편한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자신들의 과거이기 때문에. 게다가 8인회 멤버 모두가 그동안 황동만의 이야기를 자신의 작품에 조금씩 가져다 썼고, 그 사실이 들킬까 봐 불편해했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가장 정확하게 짚은 한 가지 진실입니다. 우리는 황동만 같은 사람을 보면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불편합니다. 그것도 가장 검열되지 않은 버전의 자신을. 그리고 만약이 자신이 데뷔하지 않았다면 동만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걸.. 아니 더 망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동만에게 잘난 척하는 사람들에게서 동만의 미래를 보고, 동만이 찌그러져 있는 모습에서 동만의 현재를 봅니다. 동만을 비웃는 사람들에게서도 우리를 봅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결국 거울입니다.
짠하고, 역겹고, 안쓰럽고
황동만을 보는 동안 제 안에서는 감정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짠했습니다. 30억 제작지원금 심사에서 탈락하던 장면, 변은아가 그의 시나리오의 약점을 냉정하게 짚어주던 장면, 폭식하던 그의 옆모습이 카메라에 잡힐 때. 어떤 장면에서는 역겨웠습니다. 동료가 잘 된 자리에서 식사 도중 뛰쳐나가던 모습, 형 집에 얹혀살면서도 자존심은 굽히지 못하는 모습,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에게조차 가시를 세우는 모습.
어떤 장면에서는 안쓰러웠습니다. 형 황진만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데뷔야? 성공이야? 뭐야?”라고 묻자 동만이 한참 만에 꺼낸 대답.
“불안하지 않은 거. 그냥 불안하지만 않으면 돼, 난.”
이 대답 앞에서는 짠함이라는 단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일어났습니다. 성공도 아니고 영광도 아니고, 그저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 닿고 싶다는 작은 바람. 그게 20년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
성공하고 싶다는 말 아래에는 더 단순한 바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덜 불안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제 인생의 속도를 의심하고 싶지 않은 마음. 친구의 성취 앞에서 제 부족함을 세어보고 싶지 않은 마음. 타인의 박수 소리가 제 실패를 증명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 정도의 바람조차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동만의 그 한 줄이 슬펐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감정들이 동시에 온다는 점입니다. 짠한 와중에 역겹고, 역겨운 와중에 안쓰럽고, 안쓰러운 와중에 또 짠합니다. 어떤 단정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황동만을 한 단어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매번 실패합니다.
이건 황동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박경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8인회 안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이지만, 최근 흥행 실패 이후 자격지심에 시달립니다. 아지트에서 그는 친구들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황동만만 불쌍하고 나는 안 불쌍하냐?”
그러자 이준환이 답합니다.
“불쌍해. 우리 다 불쌍해.”
이 짧은 두 문장에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을 좀 가여워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과, 우리 모두가 가여운 존재라고 합의해 주는 사람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만의 형 황진만은 또 다른 형태의 무가치함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한때는 시인이었으나, 지금은 용접공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황동만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평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극이 진행될수록 드러납니다. 시끄럽게 싸우는 동만과 조용히 묻어둔 진만. 두 형제는 무가치함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완전히 평화롭지는 못합니다. 입 밖으로 꺼내면 시끄러운 사람이 되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자기 안에서 곪습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인지 이 드라마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변은아라는 또 다른 거울
황동만을 길게 들여다보고 나면, 변은아가 다른 종류의 거울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녀는 영화사 최필름의 기획 PD이고, 시나리오를 도끼로 내리찍듯 분석한다고 해서 업계에서는 '도끼'라 불립니다. 침착하고 예리하고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황동만의 정반대에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만성적인 코피가 있습니다. 의사가 원인을 묻자 그녀가 답합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목도한 느낌일 때 코피가 난다.”
타인의 무너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약함이 자기 몸에 그대로 와서 박히는 사람. 침착해 보이지만 그녀의 몸은 누구보다 솔직합니다. 입은 다물 수 있어도 코피는 다물 수 없는 것입니다.
변은아 안에는 9살의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친모 오정희에게 버려진 변시온이라는 아이. 그녀가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이유, 어떤 자리에서도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는 이유, 사랑 앞에서조차 마음을 다 풀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아직 그녀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동만이 시끄럽게 자기 불안을 흘리는 사람이라면, 변은아는 그것을 몸 안에 묻어둔 사람입니다. 같은 무가치함을 다른 방식으로 견디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황동만을 변호합니다. 1회에서 주변 사람들이 동만을 소음 취급하자 그녀는 말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조용히 있어.”
이 한 문장은 동만을 변호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입을 다물면 사라질 것 같은 사람들의 공포를, 그녀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도끼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 마음을 알고 있는지, 그것이 이 드라마가 그녀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입니다.
3회에서 그녀는 동만의 시나리오를 읽고 이렇게 평합니다.
“천 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사람 같다.”
세상이 동만에게 닫힌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그가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평가가 아니라 발견에 가까운 한마디. 그를 고쳐주는 말이 아니라,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봐주는 말. 동만이 그토록 시끄럽게 굴어야 했던 이유는, 그를 그렇게 봐준 사람이 너무 오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찰서 장면이 있습니다. 형의 일로 경찰서에 가게 된 동만에게 직업을 묻는 질문이 떨어집니다. 무직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는 동만 옆에서, 변은아가 조용히 답합니다.
“영화감독이요.”
동만에게는 그가 20년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호명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를 무직이라 부를 때, 한 사람이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준 순간. 그 순간 이후 동만은 조금 달라집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려본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은 며칠을 더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변은아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녀가 동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동만을 알아봐 주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여본 적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무가치함과 싸울 때 조금 덜 외롭습니다. 변은아 자신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동만에게 그것을 건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상처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 있는 사람이 다른 상처를 알아보는 이야기입니다. 그 점이 이 드라마를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동만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변은아가 모두에게 다정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최필름 대표 최동현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얌전한 아이지만 만만하고 약한 애가 아닙니다.”
이 한 문장에 그녀의 두 얼굴이 들어 있습니다. 동만의 상처를 알아보는 사람이지만,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 앞에서는 물러서지 않는 사람. 다정함은 무방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자리에서 상대를 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변은아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의 알아봄이 진짜로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은 채로 상대의 무너짐을 봐주는 사람이, 가장 강한 위로를 건넬 수 있습니다.
들키는 것의 두려움, 그리고 안도
황동만을 보는 동안 가장 정확하게 떠오른 감정은 “들킨 것 같다”였습니다.
꼭꼭 숨기고 싶었던 것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들. 친구의 성공 앞에서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 순간들. 잘난 척하고 싶었던 순간들. 무능한 누군가를 속으로 비웃었던 순간들.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한참 기다렸던 순간들. 그것들이 황동만이라는 인물 안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왜 불편한가 하면, 그 모습이 그렇게나 추하기 때문입니다. 황동만이 추한 게 아니라, 황동만 안에 비친 내가 추한 것입니다. 그런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황동만을 미워하면 편할 텐데, 미워할수록 내가 미워지는 구조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들킴이 동시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들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안도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혼자만 이런 줄 알았는데, 황동만도 이렇구나. 박경세도, 8인회 멤버 모두가, 변은아도, 어쩌면 이 드라마의 모든 인물이 다들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구나.
이 드라마의 제목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 문장은 진단이 아니라 위로입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우리 모두가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는, 가장 솔직한 형태의 위로. 입 밖으로 꺼낸 사람과 꺼내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견디고 있다는 합의.
황동만을 미워할 수 없다는 말이 그를 옹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행동 중 어떤 것은 여전히 불편하고, 그를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그를 인간으로 본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가 시끄러운 이유를, 그가 뾰족한 이유를, 그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 치는 이유를 한 번쯤 헤아려본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그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첫 번째 조건일지도 모릅니다.
울고 싶다가도 웃음이 났던 이유는 그래서였습니다. 내 추함이 들킨 슬픔이 있고, 그것이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가 있고, 그 둘이 동시에 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고 진짜로 위로받는 순간은, 그 사람이 내 안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대신 보여줄 때입니다.
황동만이 변은아에게 마른 낙엽 한 장을 건네던 장면 같은 것이 있어서 이 드라마가 견딜 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빈 반찬통을 돌려주는 대신 그 안에 낙엽을 넣어 건네면서 그가 한 말은 이랬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행운이 온답니다. 잡은 행운을 토스해 드립니다.”
무가치함과 싸우는 와중에도 누군가에게 낙엽 한 장을 토스해 주는 사람. 그게 황동만이고,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추하면서 동시에 다정한 존재입니다. 두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 안에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황동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가 갑자기 변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 회까지 그는 시끄럽고 뾰족합니다. 다만 그를 보는 시청자의 시선이 바뀝니다. 정확히 말하면, 황동만이 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황동만을 보는 우리 자신이 변합니다. 처음에는 그를 미워하던 사람이, 어느새 그를 보면서 자기 안의 무언가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 인정이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황동만의 데뷔보다도...
그래서 나는 황동만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저는 황동만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미워하면 저를 미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역겨워하면 제 안의 그 부분을 역겨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비웃으면 저를 비웃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끝까지 보여주는 것은, 황동만이 좋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시끄럽고, 가끔 치졸하고, 자주 뾰족합니다. 다만 그는 그런 자신을 그대로 들고 어딘가에 도착합니다. 자신을 깎아내지도 않고, 거짓 성숙으로 포장하지도 않고, 산성이면 산성, 알칼리면 알칼리인 채로 끝까지 갑니다.
12회 시상식 무대에서 그가 신인 감독상을 받으며 남긴 소감은 그래서 더 흔들렸습니다.
“형! 나 상받았어. 나 이제 검색되는 남자야. 영실아! 삼촌 검색된다. 은아씨, 함께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 짧은 소감이 20년 싸움의 결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거창한 자아실현이나 인생관 같은 것이 아니라, 형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자신을 무시했던 누군가에게 이제는 검색된다는 작은 승리감, 자신을 알아봐 준 한 사람에 대한 감사. 그게 다였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도 그것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 한 사람만이라도.
황동만을 미워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모습 그대로 거기까지 갔습니다. 멋있게 극복하지 않았고, 깔끔하게 성숙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 모습 그대로 끝까지 갔습니다. 그렇게 가도 된다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드라마가 12회에 걸쳐 보여주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둘 중 하나입니다. 황동만처럼 들켜버린 사람이거나, 아직 안 들킨 사람이거나. 그러나 안 들킨 사람도 결국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갑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황동만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들킨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인정이 들키지 않으려고 평생 발버둥 치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조용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황동만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가장 정직했어야 할 순간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 인간 내면을 이토록 정확하게 짚어낸 박해영 작가에게 위로받고 감탄하면서, 동시에 질투를 느끼는 것도 결국 저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쓸 수 있을까? 나는 왜 저런 문장을 쓰지 못하는가? 작가의 글빨 앞에서 위축되고, 내 재능에 의문을 품고, 그러면서도 굳이 무언가를 써보겠다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저는, 황동만의 얼굴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며 황동만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황동만에 가장 가까운 순간은 이 글을 쓰는 지금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재능 앞에서 작아지면서도 그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 한 줄이라도 더 써보겠다고 굳이 앉아 있는 사람. 작가에 대한 찬사와 자신에 대한 의심이 같은 무게로 동시에 오는 사람. 그것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채 어찌어찌 한 문장씩 써 내려가는 사람. 그 모습이 황동만과 너무 겹쳐서, 마지막 문장을 쓰는 지금에야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황동만이 드라마 속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여기, 이 글을 쓰는 제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박해영 작가도 이 드라마를 쓰는 동안 자기 안의 황동만과 마주했을지 모릅니다. 인간의 무가치함을 그토록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서 그것을 본 사람일 테니까요. 그러니 이 드라마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쓴 위로가 아니라, 모두가 모두에게 건네는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고, 그 얼굴이 부끄러우면서도 묘하게 편안했습니다.
당신의 황동만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꼭꼭 눌러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면, 동시에 안아줄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며, 그리고 이 글을 쓰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