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어떤 일을 잘하고 싶어합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바카라임감과 닮아 있고, 성실함과도 닮아 있고, 무엇보다 아직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자세와 닮아 있습니다. 잘하고 싶어서 조금 더 늦게까지 남았고, 잘하고 싶어서 한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쳤고, 잘하고 싶어서 이미 끝난 일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점점 일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왜 이 정도밖에 못 할까? 왜 더 빨리 이해하지 못할까? 왜 옆 사람처럼 해내지 못할까? 왜 나는 여전히 부족할까? 노력은 앞으로 가는 일이라고 믿었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자꾸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결과물을 다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저를 깎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르네상스가 낳은 가장 단단한 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그는 돌을 깎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평생 자신을 깎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신성한 자(Il Divino)"라고 불렀지만, 그의 일생은 신의 축복이라기보다 완벽을 향한 스스로의 저주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 글은 그가 자신을 어디까지 밀어붙였는지,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 저 자신을 세워보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그는 왜, 거기까지 갔을까?
나는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 어디까지 가본 적이 있을까?
미켈란젤로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 장면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중 몇 장면은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거의 완벽주의에 그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집착에 놀라게 됩니다.
가족의 반대를 뚫은 소년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루도비코 부오나로티는 화가나 조각가가 되겠다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아스카니오 콘디비의 기록에 따르면, 부오나로티 가문은 예술을 일종의 집안의 수치로 여겼고, 어린 미켈란젤로가 미술에 빠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종종 심하게 꾸짖고 때렸다고 합니다.
피렌체의 명문 부오나로티 가문에게 조각가란 손에 흙과 돌가루를 묻히는 직공일 뿐이었습니다. 변호사나 정치인이 되어야 할 아들이 망치와 끌을 들겠다는 것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정말 잘하고 싶어질 때, 그 마음은 종종 허락보다 먼저 찾아옵니다. 누가 괜찮다고 말해주기 전에 이미 손이 움직이고, 누군가 인정해 주기 전에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은 선택이라기보다 본능에 가까웠던 듯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노력은, 처음부터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충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잘하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견뎌야 했던 것은 작업의 어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시선이었습니다.
시신 앞의 십대
피렌체, 1490년대 후반. 산토 스피리토(Santo Spirito) 수도원의 부속 병원에는 그날도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신원이 분명치 않은 가난한 환자였다고 전해집니다. 한 청년이 수도원장 니콜로 비키엘리니의 방을 두드렸습니다. 그가 부탁한 것은 단 하나, 사망한 환자의 시신을 해부할 권한이었습니다.
당시 시신 해부는 교회법상 위태로운 행위였습니다. 인체는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신학적 전제가 있었고, 그것을 가르는 일은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허락했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당시 열일곱, 혹은 열여덟이었습니다.
작업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신의 피부를 절개하고, 근육층을 들어내고, 힘줄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직접 손으로 알아냈습니다. 어떤 자세에서 어떤 근육이 긴장하는지, 어깨뼈가 팔의 회전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혔습니다. 콘디비는 이 시기의 작업이 그의 위장에 영구적 손상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패의 악취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된 것이, 결국 그가 해부를 중단한 이유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만두기 전까지 그는 이미 인체의 움직임과 외관, 뼈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축적했습니다. 한때는 조각가와 화가들을 위해 인체 해부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어 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저는 그가 시신 앞에 섰던 그 밤을 자주 떠올립니다. 흔들리는 촛불, 차가운 돌방, 메스꺼움. 그 자리에 그를 데려간 것은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인체의 "겉모습"을 흉내 내는 데 만족할 수 없다는, 정말 완벽한 인간을 만들겠다는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자 집착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인체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그것을 조각할 뿐입니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서 있는 다비드(David)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다비드의 손등에는 혈관이 도드라져 있습니다. 손목과 팔뚝의 근육은 돌인지 살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살아 있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Pietà)에서 성모의 무릎 위에 늘어진 예수의 몸은 — 죽은 자의 몸에서만 나타나는, 근육이 완전히 풀린 그 특유의 무게감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 보지 않고는 새길 수 없는 디테일입니다.
어떤 일을 진정으로 잘하고 싶을 때, 우리는 결국 그 일의 "안쪽"에 들어가야 합니다. 표면만 핥는 사람은 위기 앞에서 길을 잃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일찌감치 알아챈 사람이었습니다.
40년간 버려진 돌, 그 안에서 본 것
그가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박은 작품, 다비드(David)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는,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 무려 40여 년간 피렌체 두오모 작업장 마당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거인(Il Gigante)"이라고 불렀습니다. 1464년 조각가 아고스티노 디 두초가 처음 작업을 시도했고, 이후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어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 끌을 놓아버렸습니다. 대리석의 질이 고르지 않았고, 폭이 너무 좁아 인체의 비례를 살리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습니다. 비를 맞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누구도 손대지 않은 채로 — 그것은 거대한 흠집이자 골칫거리였습니다.
1501년, 26세의 미켈란젤로가 그 돌 앞에 섰습니다. 그는 다른 조각가들이 자주 쓰던 "이어 붙이는" 꼼수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불필요한 부분만을 깎아내는 정공법으로, 약 3년에 걸쳐 다비드를 완성했습니다.
모두가 결함을 본 곳에서, 그는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 일화가 제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천재의 안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채 40년이 흐른 그 돌 앞에 다시 끌을 들이댄다는 것은 — 실은 끔찍한 바카라임을 지는 일입니다. 실패하면 "역시 그 돌은 안 되는 돌이었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조차 망쳤다"는 말이 평생을 따라다닙니다. 그는 그 위험을 알면서도 끌을 들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사람은 종종, 남들이 포기한 자리로 일부러 걸어 들어갑니다. 그곳이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시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위조된 큐피드, 그리고 로마로 가는 길
같은 시기 그는 또 하나의 일을 합니다. 고대 그리스풍의 큐피드 상을 깎은 뒤, 그것을 일부러 땅에 묻어 마모된 것처럼 위장해 고대 유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매입자였던 추기경 라파엘레 리아리오는 곧 위작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환불을 받았지만, 그 솜씨에 감탄해 오히려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였습니다.
이 일화를 "천재의 장난"으로만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안에는 당시 한 젊은 예술가가 처한 현실이 있습니다. 이름 없는 청년의 작품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지만, "고대의 이름"을 빌리면 같은 작품이 열 배의 값을 받는 세계 — 실력이 있어도 이름이 없으면 믿어주지 않는 세계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은 실력보다 먼저 타이틀을 요구합니다. 경력, 학교, 회사 이름, 직급, 팔로워 수, 조회 수, 좋아요 개수가 우리를 먼저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하고 싶어서만이 아니라 증명하고 싶어서 애씁니다. 나를 봐달라고, 내가 만든 것을 한 번만 믿어달라고, 아직 이름은 작아도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노력합니다.
누워서 그린 4년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거절하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생각했고, 회화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콘디비는 이 일이 그의 경쟁자들이 그를 조각에서 떼어내고 라파엘로와 비교되게 만들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년이 걸렸습니다. 1508년부터 1512년까지, 그는 거의 매일 약 20미터 높이의 발판 위에 누운 자세로, 혹은 몸을 기괴하게 비튼 자세로 작업했습니다. 약 300여 명의 인물을 천장에 그려 넣었습니다. 물감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시력이 나빠졌고, 목과 허리에는 영구적인 변형이 왔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친구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에게 시 한 편을 써 보냈습니다. 미켈란젤로 본인의 친필이 남아 있어 그의 실제 글이 분명한, 매우 드문 자료입니다.
이 고문 끝에 나는 갑상선종이 자라났습니다. 수염은 하늘을 향하고, 목덜미는 뒷등에 처박혔으며, 가슴은 하피의 그것처럼 굽었습니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붓은 그것을 화려한 모자이크로 만듭니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화가가 아닙니다.
— 미켈란젤로, 조반니 다 피스토이아에게 보낸 소네트 (1509–1510년경)
저는 이 마지막 구절이 이상하게 위로가 됩니다. 인류가 기억하는 천장화를 그리던 그 사람이, 내내 "이건 내 일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완성된 결과만 보고 그 사람은 처음부터 확신에 차 있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걸작의 안쪽에는 두려움, 불만, 억울함, 몸의 통증, 자기 의심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작품이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88세, 사흘 전
1564년 2월 로마는 추웠습니다.
88세의 미켈란젤로는 한 조각상 앞에 서 있었습니다.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à). 그가 거의 10년 가까이 매달려 왔던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 — 그러나 이 조각은 한 번 완성된 형태에서 다시 깎여 나갔고, 또다시 깎여 나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만든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만들고 있었습니다.
2월 12일경. 그는 마침내 끌을 놓았습니다.
엿새 뒤인 2월 18일,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88세. 당시 평균 수명을 두 배 가까이 살아낸 노인이었습니다.
손이 멈춘 것은, 그가 멈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노력을 보고 너무 쉽게 "열정 때문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답이 아니라 동어 반복입니다. 열정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그를 거기까지 데려간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네트 중 하나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예술가도 어떤 형상을 따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형상이, 대리석 자체에 이미 품어져 있지 않는 한.
— 미켈란젤로, 소네트 151번
그에게 조각은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돌 속에 들어 있는 형상을 꺼내는 행위였습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면, 그 안에 갇혀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 이것이 그가 본 세계였습니다.
이 관점은 단순한 예술관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기독교 창조 신학이 결합된 르네상스적 세계관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은 발견이었고, 그가 도달하지 못하면 그 형상은 영원히 갇힌 채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가 멈추면, 신이 거기 넣어둔 형상도 함께 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은 그에게 불경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의 완벽주의는 종종 강박으로 묘사되지만, 그 본질은 강박이 아니라 신학적 확신에 가까웠습니다.
신은 완벽하게 창조했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것은 신의 창조를 모방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작품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신의 창조를 불완전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 어떤 의미에서는 신에 대한 결례입니다.
이 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24세에 완성한 피에타(Pietà)가 1499년경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된 직후, 미켈란젤로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저것은 다른 조각가, 크리스토포로 솔라리의 작품이라더라.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날 밤 미켈란젤로는 도구를 챙겨 다시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모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 위에 라틴어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것을 만들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것은 그가 평생 자신의 작품에 남긴 유일한 서명입니다. 전기 작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후에 이 자존심의 발동을 후회하며 다시는 작품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적었습니다.
저는 이 서명을 보고 조금 인간적인 안도감을 느낍니다. 위대한 사람도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만들었다고, 이것은 내 손에서 나왔다고, 나를 지워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 안에는, 종종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마음이 너무 오래 굶주리면, 우리는 칭찬을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라 칭찬이 없으면 무너지는 사람이 됩니다. 그때부터 노력은 자유가 아니라 생존이 됩니다.
그에게 "이 정도면 됐다"는 감각은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감각이었습니다. 신 앞에서 "이 정도"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한 번 부서졌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노력을 이해하려면, 그가 십대 시절에 겪은 한 사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15세 무렵, 그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서 동료 조각가들과 함께 마사초의 프레스코화를 모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소 동료들의 그림에 냉소적인 평을 던지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같이 있던 동료 피에트로 토리자노에게 무언가 자극적인 말을 했습니다. 격분한 토리자노는 주먹을 쥐고 미켈란젤로의 코를 가격했습니다.
토리자노는 후에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에게 그날의 일을 회고했습니다. 자신의 손마디 아래로 뼈와 연골이 비스킷처럼 으스러지는 감각이 느껴졌으며, 그 흔적은 미켈란젤로가 무덤에 갈 때까지 남을 것이라고 — 거의 자랑하듯 털어놓았다고 첼리니는 자서전에 기록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만년의 미켈란젤로 흉상에도 찌그러진 코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폭행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메디치 가의 총애를 받으며 자란 한 천재 소년이, 동료에게 자신의 얼굴을 영원히 일그러뜨리는 폭력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 미켈란젤로의 인간관계 패턴은 명백히 바뀝니다. 그는 협업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조수들과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깊은 친구도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사람 대신 돌을 택한 시점이 있다면,
아마 그날이었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인간의 동력은, 어쩌면 순수한 헌신이 아니라 — 어딘가에서 한번 깊게 부서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결연함일지 모릅니다. 다시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완벽해지려는 마음. 부족한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미리 나를 가장 혹독하게 다루는 마음.
그렇다면 완벽주의는 단지 완벽을 사랑하는 마음입니까. 어쩌면 완벽주의는 —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노력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콘디비는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가 옷과 부츠를 신은 채로 잠드는 일이 잦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부츠를 너무 오래 벗지 않아, 마침내 벗으려 할 때 발의 피부가 가죽과 함께 벗겨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할 때는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화는 그대로 낭만화하고 싶지 않은 장면입니다. 누군가의 혹사는 아름다운 미담이 아닙니다. 부츠와 함께 피부가 벗겨지는 장면은 천재의 상징이기 전에, 한 인간의 소진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이 이야기는 더 오래 남습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어디까지 사람을 데려가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부와 명성을 쌓은 뒤에도 거의 궁핍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는 기록은 여러 출처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옷을 거의 갈아입지 않았고, 목욕도 잘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옷도, 몸도, 평판도 — 작업 시간을 잡아먹는 방해물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갉아먹으며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헌신일까요?, 자기 학대일까요?. 이 질문의 어려움은, 본인조차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자신을 벗겨진 시체로 그렸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1536–1541) 중앙에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그려져 있습니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순교한 성인입니다. 그는 자신의 벗겨진 인간 껍데기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 늘어진 껍데기에 그려진 얼굴이 —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입니다.
심판받는 영혼들이 휘몰아치는 그 거대한 벽화의 한가운데에, 그는 자신을 산 사람으로도 죽은 사람으로도 아닌, "벗겨진 살가죽"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60대의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자기 묘사는 미술사에 없습니다.
위대해질수록 그는 자신을 더 작게 그렸고, 더 처참하게 그렸고, 마침내 살가죽으로 그렸습니다. 잘하기 위해 평생을 쏟아부은 사람이 60대에 마주한 자기 자신의 얼굴은 —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들려 늘어진 빈 가죽이었습니다.
미완성에 둘러싸여 죽었습니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상들이 일렬로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노예 연작(Prigioni)이라고 부릅니다. 형체가 채 드러나지 않은 채 돌 속에 갇힌 인물들. 그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대리석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들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율리오 2세 무덤 프로젝트의 일부였던 이 조각들은, 의뢰가 축소되고 일정이 바뀌면서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들이 의도적 미완성이라고 봅니다. 돌에서 형상이 빠져나오는 그 과정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그가 일부러 멈췄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사실이든 아니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평생에 걸친 작품 목록에는 미완성이 미완성을 잇습니다. 율리오 2세 무덤은 40년에 걸쳐 결국 처음 계획의 일부만 완성되었습니다. 메디치 가 채플도,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도 — 모두 미완성이거나 손도 대지 못한 채 남았습니다.
기준이 높을수록 도달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완벽주의의 잔혹한 결과입니다.
말년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청년기 미켈란젤로는 자신만만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70대, 80대로 갈수록 그는 점점 어두워집니다. 구원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보낸 시간에 대한 회한, 신 앞에 섰을 때 가져갈 것이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 — 이것들이 그의 말년을 채웁니다.
그는 평생 위대했지만, 자신은 한 번도 그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은 늘 부족했고, 늘 늦었고, 늘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스티나 천장화의 그 시 마지막 줄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나는 화가가 아닙니다." 인류의 가장 유명한 천장화를 그리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조의 말이 아닙니다. 잘하기 위해 자신을 너무 많이 깎아낸 사람이, 어느 순간 거울을 봤을 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 그런 순간의 고백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노력의 마지막 얼굴입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더 잘하지 못했다는 자바카라"으로 바뀝니다. 헌신과 자기 학대는 같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가르는 선은 — 본인조차 잘 모릅니다.
마음만 먹으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겉돌며 시간을 때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깨부수는 유일한 방법은 압도적인 결과로 증명하는 것뿐임입니다.
저는 잘하기 위해 거기까지 갔지만, 그 끝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작품의 완성이 아니라 저 자신의 소진이었습니다. 부츠와 함께 벗겨진 피부가 어떤 의미인지, 그 무렵에야 조금 이해되었습니다.
88세의 미켈란젤로는 론다니니 피에타 앞에 서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절반쯤 깎이다 멈췄고, 예수의 몸은 아직 돌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며칠을 더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끌을 놓았습니다. 엿새 뒤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88년을 끌을 들고 살았지만, 마지막 작품조차 미완성으로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는 마침내 알았습니다. 도착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는 일이었음을, 평생 그를 몰아붙인 그 무엇이 끝없이 도망치는 신기루였음을. 그래서 그는 끌을 놓았습니다.
깎는 일과 깎이는 일 사이에서
미켈란젤로는 평생 돌을 깎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진짜로 평생 깎아낸 것은 — 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는지 모릅니다.
해부를 통해 몸의 안쪽을 보려 했고, 대리석에서 인간의 형상을 꺼내려했고, 천장 위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긴장을 그렸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얼굴을 벗겨진 살가죽에 그려 넣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잘하기 위해 시신을 마주하고 속이 메스꺼워 음식을 삼키지 못할 만큼 그리고 부츠와 함께 피부가 벗겨지고 교황과 충돌할 만큼, "나는 화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끝내 천장화를 완성할 만큼 노력했습니다.
그 모든 노력의 끝에 그는 인류 미술사의 가장 거대한 봉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평생 자신을 위대하다고 느끼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결과와 위대한 소진은 종종 같은 자리에서 자랍니다. 성실함은 아름답습니다. 완벽을 향한 마음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나를 증오하는 마음은 결국 나를 비워냅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안의 형상을 꺼냈듯, 노력도 원래는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나를 꺼내는 일이었으면 합니다.
나는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 어디까지 가보았나?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미켈란젤로는 무엇을 보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