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없는 쉰 살 생일

3년 전, 나는 쉰 살이 되었다.

by케이K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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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나는 쉰 살이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한국 나이로 나이를 세는 게 싫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 살이라도 어리고 싶어서. 그래서 늘 만 나이를 고집했다. 그런데 만 나이가 표준이 된 바로 그 여름, 나는 만으로도 쉰이 되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꽉 찬 쉰.


나이 앞에서 흔들린 게 처음은 아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때도 꽤 우울했다. 젊을 때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 강해서, 한 살 더 먹는 게 싫었다. 그런데 막상 30대가 되자 정신없이 지나갔다.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우울할 틈이 없었다. 40대는 언제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말이다.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쉰은 달랐다. 반백 년. 그 숫자 앞에서 질문 하나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았을까.


40대 중반, 쌍둥이 두 딸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 나는 운영하던 사업을 정리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시간이 넘쳤다. 동동거리던 워킹맘이 하루아침에 시간 부자가 된 것이다.


처음엔 정말 몰랐다. 이 많은 시간에 뭘 하지?


그래서 홍대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기 시작했다. 발레도 시작했다. 급한 일이 없으니 학원을 오가며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었다.


가끔 남편에게 전화를 걸다가 미안해졌다. 나 이렇게 편하게 지내도 되나. 혼자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 나만 즐거운 것 같았다.


그 넘치는 시간은 점점 아이들에게로 흘러갔다. 쓸데없는 정보까지 다 모아서 아이들을 여기저기 데려갔다.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고, 간식을 싸 들고 이 수업 저 수업으로 실어 날랐다. 일하던 때의 열정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옮겨 갔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극성 엄마가 되었다.


그 시절의 대표작이 있다. 엑셀로 만든 시간표다. 부엌 벽에 붙여두면 아이들은 그걸 보고 알아서 바카라을 읽고, 숙제를 하고, 놀았다. 시키지 않아도 딱딱 움직였다. 나는 그게 참 뿌듯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때 그렇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게 무슨 도움이 됐나 싶다. 글쎄다. 박물관에 가서 뭘 봤는지, 무슨 행사에 가서 뭘 했는지 아이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는데.

오히려 부작용이 된 것 같다. 지금은 어디 가자고 하면 시큰둥하다. 사춘기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릴 때 끊임없이 자극을 받은 아이들은 웬만한 건 재미있어하지 않는다. 새로운 곳에 데려가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솔직히 인정하자. 그건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무료해서 새로운 곳을 찾아 돌아다닌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 수영. 우리 아이들은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물에서도 스스로 떠서 헤엄칠 수 있다. 생존이 걸린 일이니, 이거 하나는 잘한 것 같다.


그럼 그렇게 공을 들였으니 아이들이 아빠보다 나를 더 좋아할까. 그렇지도 않다. 큰애는 아빠 껌딱지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소울메이트가 아빠다. 작은애는 나와 아빠를 똑같이 좋아한다.


아이들은 정직하다. 사랑을 양으로 재지 않고 질로 잰다.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로 잰다. 그리고 그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내가 부린 극성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아이들을 덜 사랑했다는 말이 아니다. 공을 더 들였다고 더 사랑하는 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고학년이 되자 부엌의 시간표는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유난히 고집이 세거나 말을 안 듣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시간이 소중해졌을 뿐이다. 친구 엄마와 통화해서 누구네 집에 놀러 갈지 정해주던 일도, 이제는 아이들이 알아서 한다. 성적 잔소리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먹히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이 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일어나자, 내 존재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존재감이란 결국 내가 한 일로 누군가가 나아지는 데서 온다. 내 덕분에 아이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우리 집이 더 나은 가정이 되는 것. 그런데 내가 이 집에 보탠 건 극성과 잔소리였다. 가족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진을 빼는 사람. 그게 나였다.


물론 나는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에게 사랑받는다. 그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받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남편과 나는 동갑이다. 같은 시간을 살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교가 쉽다. 쉬워서 문제다.


그 시간 동안 남편은 건실하게 자기 회사를 키웠다. 남편은 일하면서도, 취미로 시작한 주짓수로 아시아 챔피언에 이어 팬퍼시픽 챔피언까지 땄다. 나는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발레로 콩쿠르에 나가 거의 꼴찌를 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일에 시간과 돈을 꾸준히 쏟고 있었다. 비싼 취미였다.


경제력은 남편이 가져온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밥을 먹인다. 그런데 그건 가사도우미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남편이 없으면 이 집은 돌아가기 힘들다. 내가 없으면? 도우미 한 분이면 해결될 것 같았다.


내가 사업을 정리하긴 했지만, 매달 수익이 나오는 건물을 살 만큼의 엑시트는 아니었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 없이 내가 이 집을 꾸려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 간다. 젊지도 않고, 어디에 있어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나를 보면 솔직히 속상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경제력이 없다.

있으나 없으나 한 사람. 반백 년을 살고 내가 마주한 건 그런 나였다.


사람은 쓸모없다고 느낄 때 가장 무력해진다. 그 무력함은 생각보다 크다. 쉰 살이나 먹은 어른이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정말로,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생일이었다.

그토록 야망 많던 20대의 나는, 어느새 존재감 없는 50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음 화 「감히 다시 사업을 시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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